|
시건방진 김지하 때리기
|
김지하의 마지 못한 정치참여 비난한 좌편파성
|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의 해괴한 좌편향성이 조선일보의 숨은 정체성을 상징하는가? 2011년 8월 “좌파에게 배울 점”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나는 좌파세력의 뛰어난 감각과 기민함에 늘 탄복한다”고 고백한 최보식 조선일보 기자는 “시위대를 태운 버스를 '희망버스'라고 이름붙인 것은 우파의 머리로는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어림없다... 잠깐 오른쪽을 기웃거리던 68세의 황석영씨도 운동모를 쓴 채 자랑스럽게 시위버스에 올라탔다. 그만큼 국내 가치시장에서 좌파가 더 매력적이 됐다는 뜻이다. 그 이유를 우파는 탐구하고 반성해야 한다”며 좌파의 능력을 찬미하고 우파의 무능을 질타했다. 마치 수박 겉핥듯이 좌파와 우파를 관찰한 것이다. 우파의 지혜와 용기는 사회에 절망과 좌절을 조장하는 정치선동에 ‘희망’이라는 단어를 붙일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는 점을 좌익의 교활함에 감탄한 최보식 기자는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최보식 기자는 장기적으로 ‘희망버스’가 좌익진영에 절망을 안긴다는 사실에 무지한 판단력을 가진 피상적 기자인 것이다. 종북세력의 번성에 답답해하는 저변 국민들의 심정을 시원하게 전달하는 김지하 시인의 입을 틀어막는 최보식 기자의 정체는 뭘까?
최보식 기자는 2011년 8월 당시 “사회 분위기도 좌파 쪽에 우호적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한진중공업 시위대에는 야유회 오듯 아이를 동반한 젊은 부부도 있었다”며 “시위 현장에서 즉석 모금함을 돌리면 제 호주머니를 비울 줄 안다. 선거판에서 우파는 '실탄'을 내려줘야 움직이지만, 이들(좌파)은 자기 돈을 들여가면서 뛴다. 자신들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정권을 바꾸기 위해 지금 자신의 것을 양보하고 희생도 감수한다”며 ‘좌익진영의 희생정신’과 ‘우익진영의 이기심’을 비교하기도 했다. 이는 피상적 판단에 의한 착각일 뿐이다. 최보식 기자는 “이들(좌파)의 열정, 조직력, 목표를 향한 단합이야말로 우파가 꼭 배워야 할 것”이라며 “소집 신호음이 발령나면, 이들은 5분대기조인듯 금세 몰려온다. 한진중공업에도 광우병 촛불시위를 주도했던 60여개 단체가 속속 집결했다”며 좌익의 단결력을 찬양했다. 조선일보의 선임기자가 권력의 명령과 이익의 네트워크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좌익세력의 ‘동원능력’을 이렇게 ‘자발적 희생’이라고 오판하니, 대한민국의 정보시장이 거짓과 기만이 난무하는 암흑시대에 머문 것이다.
최보식 기자는 “이들(영도조선소에 나타난 좌익세력)과 맞선 우파의 모습은 황혼에 가까운 노인들이었다. 노인들은 시위대와 마주치자 '저 빨갱이!' 흥분했다. 힘에 부쳐 길에서 쓰러질 듯했지만, '이 나라를 어떻게 지켜냈는데' 하는 사명감으로 자신을 지탱했을 것”이라며 “한때 좌파에 결정타를 먹였던 '빨갱이'는 이제 용어의 힘을 잃었다. 나라를 걱정해온 어른들로서는 기운이 빠지겠지만. '급진 좌경세력'이란 1980년대 말도 더 이상 우리 사회를 경각시키지 못한다. 그렇게 말할수록 말하는 사람만 점점 구닥다리로 밀려난다. 이제 젊은 세대는 '극우'와 '보수 꼴통'을 더 조롱하고, 그걸 멋으로 안다. 좌파세력이 우파 전체에 덮어씌워 놓은 용어전략이 효과를 본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파의 단결력은 위기의 순간에 좌파의 단결력을 압도할 것이라는 사실을 최보식 기자는 잘 모르고 있어 보인다. 그리고 “한때 좌파에 결정타를 먹였던 '빨갱이'는 이제 용어의 힘을 잃었다”는 주장도 최보식 기자의 착각인 것이다. 이번에 확인되었듯이, 조선닷컴이 ‘빨갱이’라는 용어를 못 쓰게 검열해서 막았지만, 성숙한 국민들은 ‘빨갱이 심판’을 대선의 최고 화두로 삼은 것이다. 최보식 기자는 이번 대선의 최고 화두가 빨갱이 척결이었다고 인정할까?
“우파로 넘어오는 순간 이런 (좌파의) 전율할 만한 감동은 사라진다. 힘센 자, 돈 많은 자, 지위 높은 자, 능력 있는 자들은 자유시장경제의 과실만 따갈 뿐이다. 그 체제를 바르게 지켜낼 의무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본 적이 없다. 열정도 없고, 해야 할 절박성도 못 느낀다. 약자와 소외자에 대한 정의감도 없다. 오늘 하루 자신만의 멋진 식사와 취미생활, 편안한 잠을 방해받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서 높이 40m 크레인에 올라가 200여일 농성한 김진숙씨를 '좌파 불순세력'으로 쉽게 욕한다”며 “우파에서는 그 누구도 그런 크레인에 올라갈 용기가 없다. 그늘 속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문제를 우파의 고민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크레인 농성자보다 '우파'로 상징되는 그 회장님을 향해 고개를 흔드는 게 우리 사회의 균형감각이다. 우파가 아직 몰락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라고 우파를 비판했다. 최보식 기자는 조선일보의 데스크에 앉아 있는 ‘기회주의적 웰빙족’을 우파로 착각한 모양인데, 우익세력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의와 헌신도 좌익세력보다 훨씬 더 많이 실천하는 자들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최보식 기자가 어디에서 교육을 받았는지 모르나, ‘좌익 정치광신도의 광기’와 ‘우익 국민의 자발적 열심’을 구별할 능력도 없는 것 같다.
최보식 기자의 이런 잘못된 정치의식은 최근 CBS를 향해 ‘이 방송이 빨갱이 방송이요?’라고 일갈한 김지하 시인에 대한 평가에서도 나타난다. 마치 2년 전 우파진영을 혹평했듯이 , 최보식 선임기자 2013년 1월 11일 백낙청, 안철수, 문재인 등을 ‘깡통 빨갱이’ 등의 용어로 혹평한 김지하를 삐딱한 시각으로 혹평했다. “그의 박근혜 후보 지지 선언은 대선판에서 상징적 효과가 컸던 게 틀림없다”라고 김지하 시인의 정치적 역할을 지적하면서, 최보식 기자는 “선거와 정치판에서 잘 싸우는 역할은 그와 같은 시인(詩人)이 아니어도 할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정치에서 절제란 할 말 못 할 말 구분하고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구분하는 거야. 그런 것도 없는 사람(안철수씨)이 자기 전문 영역과 정치의 관계도 모르고’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바로 그 자신도 그런 함정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며 좌익정치인들에 대한 김지하 시인의 의무적 일갈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온 국민들이 백낙청, 안철수, 문재인의 종북좌익속성을 독립운동 하듯이 비판해야 했는데, 최보식은 김지하의 비판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윤창중, 김지하 등을 때리는 좌익선동꾼들의 절박한 심정은 이해하지만, 최보식 기자는 어리석다.
좌익이 조직적으로 동원한 ‘희망버스’를 타고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를 둘러싼 야간폭동을 지원하러 가던 황석영을 호평하던 최보식 기자는 김지하 시인의 정치적 발언에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않고 혹평한 것이다. 최보식 기자는 “그(김지하)는 자신이 초연한 위치에 있다고 믿지만, 박근혜 당선인의 맨 앞줄에 전사(戰士)처럼 서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는 한 수 훈계를 한다고 여기겠지만,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언어는 단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뿐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 그는 시대와의 화해를 얘기했지만, 현실에서는 불화와 분열을 더 조장할 공산이 높다”며 김지하 시인의 정치적 발언을 우파진영의 정치싸움으로 한정했다. 종북좌익세력의 핵심으로 변해버린 자칭 ‘민주투사’들의 타락에 분개하는 민주투사 김지하의 정치(윤리)의식에 대한 최소한의 감각이나 이해도 최보식 기자는 가지지 못한 것이다. 좌익세력의 거짓선동과 군중동원에 일체 비판하지 않던 최보식 기자는 김지하의 정의로운 정치적 참여에 대해서는 마치 정치꾼의 악행인양 비판을 가하고 있다. 최보식 기자는 백낙청, 공지영, 황석영, 조국 등의 추악한 정치참여에 비판한 적이 있던가? 왜 하필 김지하의 자구적 정치발언에만 최보식은 딴지를 걸까?
최보식 기자는 “매스컴은 그를 찾고 우파 단체도 모시려고 한다. 그의 말문이 열릴 때마다 세간의 반응은 폭발적이다”라며 “그동안의 고립과 소외감에서 그가 벗어날 때도 됐지 않았는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대접받는 날도 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재미에 빠질수록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부채 의식과 경외심, 시인다운 시인에 대한 기억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김지하 시인의 최근 언행을 비판했다. 김지하 같은 성격의 시인 고독(solitude)을 즐기지만 외로움(loneliness)이 없다는 사실을 최보식 같은 저급한 기자 나부랭이는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최보식은 “좌파 진영에서 뭐라고 욕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는 그냥 흘려버려도 된다. 정작 귀담아들어야 할 것은 내 주변의 생각 있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말이다”라고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노년의 김지하가 왜 저렇게 됐을까”라는 좌익진영의 김지하 비난을 들이댔다. 김지하의 입장초월성을 이해도 하지 못한 최보식 기자는 “특정 이념과 정파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이런 작은 목소리도 묻혀있는 것”이라며 마치 김지하가 우파진영의 잘못된 환호에 묻혀서 망해가듯이 비난했다.
“김지하씨가 거울 앞에 서면 그 속에는 황석영씨가 보인다”며 김지하와 황석영을 동급으로 비교한 최보식 기자는 “그(황석영)는 선거 과정에서 직접 나서서 야당의 단일화를 촉구했고, '국민연대'도 결성했다. 의식 있는 작가라면 사회적 발언에 의무감을 느낄 것이다. 독재 정권에서 작가들은 자유·민주주의·인권·평등 같은 '가치'를 위해 투쟁했고,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문단에서 수십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작가가 직접 선거판에 개입한 것은 흔한 구경거리는 아니다”라며 ‘황석영의 발가벗은 좌익세력 단일화 작업’과 ‘김지하의 간헐적인 정치적 발언’을 동일시했다. 최보식의 한계는 황석영 따위를 두고 ‘한국 문단에서 수십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소설가’라는 평가에서 쉽게 드러난다. 북한에 가서 ‘님을 위한 교향시’라는 적화선동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던 황석영이 최보식의 눈에는 ‘수십년 만에 나오는 작가’인 것이다. 최보식 기자는 언론계에 유능한 축에 들면서도, 황석영의 줄기찬 종북좌익노선에 비판적이지 않을 정도로 종북좌익적 시각을 가진 것 같다. 조선일보 논설위원들에게 반복해서 확인하듯이, 조금 교묘한 듯하지만, 유치한 최보식 기자의 김지하 비난이다.
최보식은 김지하에게는 혹독한 비판을 하면서도 황석영에게는 어리버리한 비판을 한다. “선거에 패한 뒤 그는 신작 홍보를 겸해 전국을 돌며 '선거 결과에 대한 박탈감과 상실감을 치료해준다'는 취지로 '힐링 사인회'를 연다고 했다”면서 황석영의 “서로 반대편 지지자를 적대시하고 공격하는 것은 올바른 시민 의식이 아니다”라는 말을 전한 최보식 기자는 “사실 이는 그가 그동안 입장이 다른 특정 언론 매체와 문인들에게 쭉 취해오던 태도였다”고 적었다. 황석영에 대한 최보식의 이런 평가를 들으면, 원탁회의로써 종북좌익세력의 대동단결을 도모한 황석영의 정치적 악행이 묽어진다. 최보식 기자는 “지금 인터넷에서는 정치권력 앞에서 그가 말을 바꾼 사례가 떠돌며 집중 공격을 받는 중이다. '구라'가 좋은 소설가에게 그까짓 말 좀 바꾼 게 무엇이 흠일까”라며 은근히 황석영을 비호한다. 며칠 전에 광주를 방문해서, ‘광주가 민주주의의 줏대를 지켰다’고 망발한 황석영의 정치적 해악이 최보식 기자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가? 좌익후보를 위한 광주의 90% 몰표를 황석영이 비판하라고 최보식 기자는 촉구했어야 하지 않았나?
마치 황석영이 처음 정치에 개입한 것을 보았는 듯이 최보식은 “하지만 이제 그(황석영)를 더 이상 작가로서 여유 있게 봐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한때 그의 독자들도 즐거운 마음만으로 그의 작품을 읽을 순 없을 것이다”라고 황석영을 미약하게 비판했다. 황석영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종북좌익세력을 위한 정치만 해왔다는 사실이 최보식에게는 보이지 않았던가? “김지하나 황석영씨쯤 되면 '독립된 개인'으로서 외로운 위치를 지켜야 하는 의무도 있지 않을까. 꼭 정치판에 휩쓸려야 사는 맛이 나는지도 만나면 물어볼 작정이다”라며 최보식 기자는 ‘종북좌익세력의 문화선동꾼 황석영’과 ‘종북좌익세력의 문화선동에 격분한 김지하’를 동급으로 싸잡아 ‘정치판에 달려든 작가’로 매도했다. 아무리 조선일보가 좌익과 우익, 선과 악, 호국과 망국에 대한 판별력이 없는 기회주의적 웰빙족들이 모인 언론매체라고 하더라고, 어떻게 김지하의 피할 수 없는 정치적 발언과 황석영의 집요한 정치참여를 동등하게 평가한단 말인가? 빨갱이들에게 일갈하는 김지하와 빨갱이들을 대변하는 황석영이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에게는 같은 부류의 ‘정치작가’로 보이는가?
<김지하씨에게 '환호'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 최보식 칼럼에 조선닷컴의 한 네티즌(mca**)은 “기자가 아직은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하는 것 같다. 왜 그리 못마땅할까? 명진이니 법륜이니 정치인을 방북하는 승려, 공지영, 김용옥, 조국 등의 설침은 수년이 넘었는데 이들은 자연스럽나? 김 시인이야 자신의 이력과 관련, 여당후보의 통합행보에 자연히 드러난 경우에 불과하다. 그 계기로 자신의 정체성도 밝히며 오늘날 한심한 한국 정치판을 향해 충분히 할 만한 소리를 한 것”이라고 했고, 다른 네티즌(daedo****)은 “조선과 최보식이가 왜 하필 이때 김지하의 말을 붙들고 늘어질까요? 언론이 관심 가질만한 일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 이 중요한 시점에. 박정희의 여식 박근혜가 권력 잡자, 본색을 드러내는 기득권 집단들이 한둘이 아닙니다”라 했고, 또 다른 네티즌(write****)은 “김지하 시인이 국민들 가슴에 와 닫는 것은 바른 사고와 정의감 때문이다. 과거에는 독재에 맞서는 게 정의였고, 지금은 세상의 순리에 저항하고 쌩떼를 부리는 종북OO에 맞서는 게 대한민국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석영이는 저질이다. 독재자 정일이에게 꼬리친 주제에 박근혜 당선인에게 점령군 운운하는 꼬라지는 목불인견이다. 최보식기자, 은근히 좌파적 냄새가 풍긴다”고 반응했다.
우파진영은 ‘빨갱이’라고 외칠 줄 밖에 모른다던 최보식 기자가 조선일보의 저급한 수준을 증거한다. 최보식 기자는 허튼 곳에서 인터뷰 하지 말고, 나에게 오라. 그러면 왜 우익세력이 좌익세력과 비견될 수 없는 헌신과 봉사와 애국의 집단인지 가르쳐 주겠다. 왜 우익세력이 더 자기희생적인 애국집단이고, 자발적으로 단합되어 나라를 지킬 능력이 있고, 희망버스와 같은 어리석은 자해극을 벌어지 않는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노무현 좌익정권 당시에 네티즌들이 ‘빨갱이’라는 용어를 조선닷컴의 댓글에 사용하지 못하게 막은 조선일보의 본색도 가르쳐 줄 것이다. 김지하의 마지 못한 ‘생존본능적 정치발언’과 황석영이 수행해온 ‘의도적 정치공작’을 동급의 정치참여로 평가하는 최보식 기자의 눈먼 상태도 교정시켜야 한다. 종북좌익세력의 망국적 해악과 우익애국세력의 구국적 희생을 구별할 능력이 없는 조선일보가 ‘종북좌익세력’을 ‘진보’로 무지부터 고치라고 최보식 기자는 조선일보에 시위하라. 김지하 시인의 신발끈을 맬 자격도 없는 최보식이 건방지게 김지하 시인에게 간섭하는 질타가 꼴불견이다.
이동욱 전 월간조선 기자도 “‘최보식칼럼’ 讀後感으로 느끼는 逸脫感”이라는 글을 통해 “인간이 말과 글로 그려내는 원은 결코 정원(正圓)이 될 수 없다는 데 인간의 한계가 있는 것인가? 11일 아침 <조선일보>에서 읽은 ‘최보식칼럼’의 훌륭한 글 <김지하에게 ‘환호’할 수 없는 마음>의 독후감(讀後感)으로 그 같은 상념(想念)이 머리를 때린다. 최보식은 글에서 김지하와 황석영의 경우를 다룬다. 그런데, 그가 빠뜨린 것이 있다. 현대판 ‘동물농장’인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 북한판 ‘나폴레온’ 김일성으로부터 ‘양아들’ 대접을 받으면서 북한판 ‘통일행진곡’에 맞추어 곱사춤을 추었던 황석영의 방북 행각에 대해서는 어째서 언급이 없는 것인가. 최근 김지하가 보여 준 ‘막말’ 식 표현에 대한 저항감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래도, 황석영을 거론하여 김지하를 비판하는 최보식의 사고(思考)에서 필자는 역시 일탈(逸脫)을 느끼게 된다>며 최보식 기자의 몰개념성을 질타했다. 좌익과 우익, 망국과 흥국, 선과 악, 독재와 민주에 대한 기본적 감각이 없는 조선일보의 한계를 최보식 선임기자가 가장 압축적으로 표출했다는 듯한 반응이 우익진영에서 나오고 있다.
조갑제닷컴의 한 회원논객(BULLET)도 “대체 최 기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진정, 오늘까지 최보식 기자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체 최보식 기자를 어떻게 알고 있었단 말인지, 골머리가 빠개질 만큼 아파온다. 필자뿐 아니라 그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남다른 필력을 자랑하며 몇 년 전 <매혹>이라는 문학작품을 낼 정도로 心眼이 열린 기자인 줄 알았을 것이다. 평범한 기자들이 파헤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心府 깊숙한 곳, 그늘지고 음습하거나 혹은 너무나 애달프고 서러워 쉽게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를 잘도 캐내 독자를 감동시키는 능력과 인품의 기자인 줄 알았을 것”이라며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 모두 총탄에 죽었다... 더 이상 따지고 궁금해 할 단계는 지났다>고 덮어버리고 문장을 다른 주제로 옮기는 최보식의 心眼은 이미 닫혀져버렸다. 대신에 잔머리 굴려 이리 쑤시고 저리 자르고 잽싸게 빠지는 영리한 腦眼의 기자에 다를 바 없음을 보여주었다”고 최보식 기자를 혹평했다. 그 네티즌 논객은 “역사의식도 없고, 인간에 대한 예의나 연민도 부족하고, 세상을 비틀어 보는 데 너무 익숙하다 보니 마음조차 비틀어 진 것은 아닌지 나도 자네 만나면 물어볼 작정이다. 그 좋던 글이 왜 이렇게 망가졌나”라고 개탄했다.
요사스럽지만 무지한 조선일보 논설위원이나 기자들의 저수준이 보수우익진영의 고수준을 따라 붙이지 못해서, 조선일보가 우익애국진영에서 배척당하기 시작한다. 조선일보의 홍준호 논설위원도 최근에 “더 많은 '이준석'을 보고 싶다”는 요설을 풀다가 우익논객들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김대중 집권 후에 조선일보의 논설위원들은 기회주의적 웰빙족들로 채워진 게 아닌가 의심된다. 대한민국에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종북좌익세력에게 당당하게 주인의 입장에서 질타하는 주권행사도 하지 못하는 겁약한 기회주의자들이 안락하게 하는 동물적 본능에만 충실해서 좌우익의 눈치를 보는 요설을 풀어대는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건설해온 강건한 우익애국진영의 대변지가 되지 못한 것이다. 조선일보가 김지하의 자위본능적 정치행위와 황석영의 주도면밀한 정치행각을 구별하여 칭찬과 비판을 가할 능력이 없는 자들에 의해 장악된다면, 좌익세력의 노골적 선동매체인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프레시안보다 더 저질의 망국선동수단으로 전락될 것이다. 눈치 빠른 기회주의적 웰빙족들의 아지트 조선일보는 이제 우익애국진영에 눈치볼 때가 되지 않았나? [조영환 편집인: http://allinkorea.net]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