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꼼수 반대하는 글을 처음 썼던 작년 11월만 해도, 저는 친구의 반을 잃을 각오를 해야 했었습니다. 비키니 파동조차 있기 전이었으니. 그들의 문화권력은 탄탄 대로였지요.
2. 저의 가슴을 때린 것은 제 3계명,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벗들은 ‘기독교는 잘못이 없냐? 잘못한게 있으니 공격받는거지.’ 라는 태도로 일관했지요.
3. 정말 그 이유로 나꼼수를 들었다면, 교회에 대한 애통함과 금식으로 들었어야 합니다. 낄낄대다 조롱하며 의혹품고 그들이 욕하는 상대를 함께 저주하면서가 아니라.
4. 기독교가 완벽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웠다는 초대교회 때 조차, 교회는 아이를 잡아먹고 혼음을 즐긴다는 누명을 썼지요. 모든 비난이 비난받는자의 잘못은 아닙니다. 더욱이 우리가 성인용품 장사꾼 김어준과 욕설대장 김용민이 비난해도 될 만큼 썩은 교회는 아닙니다.
5. 나꼼수의 표현법은 틀려도, 그들의 말은 옳다고도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쩌면 특정 주제들에 그런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것이 죄악을 합리화 해주지는 않습니다.
6. 나꼼수의 가장 큰 죄악은 신성모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욕받을 때는 결코 마음으로 동참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모욕받고 계신데, 나는 귀가 즐겁다면 그것은 깨진 사랑입니다.
7. 그 다음 죄악은, 기득권에 대한 증오와 정의감을 햇갈리게 만든 것입니다. 음란과 욕설을 즐기면서도 자신들이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확신을 주는것. 이것이 바로 미혹의 영입니다.
8. 나꼼수를 즐기는 청년들이 포기하지 못했던 한가지. 그것은 ‘한풀이’입니다. 자신들의 절망, 슬픔, 스트레스를 욕설과 음모론, ‘기득권’이라는 주적을 제공함으로써 긁어준 쾌감이죠
9. 이것은 근본적인 데스메탈이나 오컬트, 사타니즘, 뉴에이지, 폭주족이 주는 쾌감과 일맥상통합니다. 이 모든 뿌리는 ‘마귀적인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연결됩니다.
10. 오컬트가 추구한 것은 종교권력이고. 그들의 영향력은 미미했지요. 그러나 뉴에이지나 데스메탈은 문화권력을,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은 학문 권력을 지향하기에 더욱 위험합니다. 그들은 캠퍼스와 젊은이 문화를 장악했습니다. 각기 다른 영역에서, 동일한 종류의 쾌감을 주면서.
11. 이제 나꼼수와 딴지일보가 추구하는 것은, 두렵게도 정치권력입니다. 미래 권력들이죠. 그 한과 절망감을 ‘투표근’을 통해 풀어보자고 합니다. 이것은 사타니즘의 가장 발달된 형태. 그러나 불질러진 절망감과 증오는 성도들의 눈을 가려 버렸습니다.
12. 많은 성도들은, 왕따가 될까봐 말 한마디, 글 한자락 제대로 풀어놓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신중함의 탈을 쓴 비겁함입니다.
13. 이제 나꼼수에게 여성단체는 조심해야 할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비판해도 되는 영역이 되어버렸죠. 교회가 욕먹을 때 성도들은 낄낄대거나 침묵했지만, 여성이 모욕당할 때 여성단체들은 울었고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14. 겁쟁이 바락에게 “시스라는 비겁한 네가 아닌 여인의 손에 죽으리라” 일갈했던 드보라 때 처럼, 용감한 여성들은 성도들이 못한 나꼼수 제동걸기를 몇 번이나 성공했습니다.
15. 그들의 영향력은 곧 끊길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며 오래 간 세력은 없으니. 벌써 하나님께서는 교육계, 여성계, 문화계의 뜻있는 자들을 사용해서 그들을 치워내고 계십니다.
16. 그러나 주님의 신부들은 나꼼수에 동조하고 즐긴적만 있지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침뱉음 당할 때 막아서지 않은 것입니다.
17. 고교 시절 함께 찬양했던 동기에게, 교회 청소를 같이하던 든든한 성도에게, 십여년간 선교지의 사선을 함께 넘었던 친구들에게, 신학교에서 함께 눈물 흘리며 정진했던 동문들에게.. 진심으로 한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18. 나꼼수만은 마음에서 버릴 수 없다는 형제들이여. 단 한번이라도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기도해 본적이 있나요? 여러 사람에게 반년간 물어왔지만 아직 한사람도 대답을 해준적이 없습니다. 이 문제만은 기도조차 해 보기 싫은 것인지요.
19. 2012년 현재, 나꼼수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싸늘하리 외로운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 서기에 주님은 조금 덜 외로우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