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F 創立을 주도한 미국 관리가 소련 간첩
|
|
그는 미국 공산당의 지하당원으로서 재무부 고위직에 올랐다. 職位를 이용, 소련에 독일화폐銅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세계의 금융질서를 이끄는 IMF와 세계은행의 創立에 소련 정보기관에 간첩으로 포섭된 미국 재부부의 고위 관리가 주도적으로 개입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그 간첩의 이름은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이다. 그는 미국 재무부의 海外담당 책임자로서 1944년 미국의 브레턴 우즈에서 IMF를 만들기 위한 회의를 할 때 영국 경제학자 케인즈와 함께 참석하여 그 뒤 세계금융질서를 이끌어갈 기관의 産母역할을 하였다. 1892년 보스턴에서 유태系 리투아니아人 집안에서 난 화이트는 콜럼비아, 스탠포드를 거쳐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교수 생활을 좀 하다가 재무부에 들어갔다. 화이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지지하였다. 재무부에 들어갔을 때 이미 화이트는 미국 공산당의 地下조직원으로 활동중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화이트는 당시 재무장관이던 헨리 모겐소 2세의 보좌관으로서 국무부와 연락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는 많은 고급 정보에 접하게 되었다. 親共주의자인 헨리 월래스 부통령의 신임도 받았다. 화이트는 이윽고 재무부의 海外담당 책임자로 승진하였다. 이때 그가 主導하여 만든 것이 '모겐소 계획'이다. 2차 대전이 끝나면 독일의 産業시설과 군대를 해체하여 농업국가로 전락시킨다는 계획이었다. 화이트는 이 계획서를 소련측에 미리 제공하였다. 이 계획은 언론에 새어나갔다. 독일의 괴벨스는 이 언론보도를 이용하여 독일사람들에게 決死抗戰을 호소하였다. 소련의 스탈린은 당시 독일이 미국 영국과 먼저 강화한 뒤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모겐소 계획의 공개로 독일이 발끈함으로써 그런 염려가 사라졌다. 화이트가 소련을 위하여 이 계획서를 言論에 누출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1945년 11월 소련 스파이 엘리자베스 벤틀레이가 서방세계로 탈출, 화이트의 正體에 대하여 FBI에 진술하였다. 벤틀레이는 화이트가 기밀문서를 스파이網을 통하여 소련측에 제공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FBI 국장 에드가 후버는 화이트를 비롯한 소련 간첩일 가능성이 높은 공무원들의 명단을 만들어 트루먼 대통령의 군사문제 보좌관 해리 본 장군에게 전달하였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 직후 화이트를 IMF의 미국측 理事로 임명하였다. 이 자리는 사실상 IMF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要職이었다. 벤틀레이는 화이트의 반역행위에 대한 결정적 증언을 하나 하였다. 1944년 미국 재무부는 독일을 점령한 뒤 발행할 화폐의 인쇄용 銅版을 만들어 갖고 있었다. 소련 정보기관은 화이트에게 그 銅版을 소련에 제공해주도록 힘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화이트가 '미국 재무부는 그 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보고를 한 사실이 그 50년 뒤 당시 소련 정보기관 미국 과장의 증언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소련은 銅版을 얻어가선 독일점령지에서 멋대로 화폐를 발행, 인플레를 촉발시키고 미국의 물자를 구입하는 등 2억5000만 달러의 손해를 끼쳤다고 한다. 화이트는 1943년엔 反共 蔣介石 정부에 미국 정부가 2억 달러를 원조하기로 하였는데도 해외업무 책임자란 위치를 惡用하여 그 집행을 방해하였다. 1948년 8월 미국 하원이 '非미국활동조사'를 할 때 화이트는 불려가서 증언을 하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심장발작을 일으켜 며칠 뒤 사망하였다. 당시 나이는 56세였다. 그가 죽은 뒤 화이트가 간첩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많이 나왔다. 미국 NSA는 소련 등 외국의 암호 통신을 해독하는 VENONA 계획을 운영하고 있었다. 냉전이 끝난 후 그 자료들이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이 암호해독 문서에 따르면 화이트는 '주리스트' 등 세 개의 암호명을 갖고 있었다. 미국 법무부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주리스트'는 1944년 재무부 고위직에 있으면서 핸리 월래스 부통령과 훌 국무장관의 대화 내용을 소련측에 제공하는 등 暗躍하고 있었다. 그는 또 미국 공산당원이 재무부에서 출세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헨리 월래스 부통령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4년에 죽었더라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을 사람이다. 그는 "내가 만약 대통령이 되면 화이트를 재무장관, 로렌스 더간을 국무장관에 앉힐 생각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더간은 국무부의 南美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또한 소련 간첩이었다. 더간도 1948년 美 하원의 조사를 받은 뒤 뉴욕 맨해턴의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소련 문서에 적힌 그의 암호명은 '프랭크'였다. 1944년 7월 미국 민주당이 全黨대회 決選투표에서 트루먼을 부통령 후보로 뽑지 않았더라면 1차 투표에서 1등을 한 월래스가 부통령이 되어 1945년 4월 루스벨트가 죽은 뒤 대통령직을 承繼, 소련 간첩들을 재무장관 및 국무장관직에 앉혔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도 못하고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정일 정권이 무너진 뒤 북한측 문서와 國情院의 존안 자료가 공개되면 한국에도 화이트와 같은 거물간첩이 정부안에서 親北的인 정책을 입안, 집행하였음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화이트와 같은 엘리트중의 엘리트가 소련 간첩이 되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이념 때문이다. 이념은 가치관이다. 그는 미국 정부내의 要職에 있으면서도 소련 정보기관의 말단 공작원을 대통령 모시듯 하였다. 李明博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이념은 별 것 아니라는 말을 하게 되면 어딘가에 숨어 있을 북한노동당 간첩들이 미소를 지을지 모른다. 이념은 신념이다. 현재로선 이 나라에 공산주의를 신념으로 받아들인 자가 장교, 판사, 국회의원, 대통령이 되는 길을 막을 방법이 없다. 대통령부터가 이념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
|
|
전체 독자의견: 2 건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