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융합 성공,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난주 서울 모처에서 진행된 황장엽(87) 전 노동당 비서와의 대담에서 흘러나온 한마디는 기자의 귀를 의심케 했다.
하지만 황 전 비서의 어조는 단호했다. 고령이 무색할 정도로 형형한 눈빛을 내뿜은 그는 ‘충분히’라는 부사를 거듭 강조했다. 이 말은 다른 그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한 때 북한체제의 핵심 중의 핵심실세로서 정책을 주도했던 황 전 비서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지난 5월 12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인용한 ‘조선에서 핵융합에 성공’ 제하 보도에서 북한이 핵융합 반응 실험에 성공했다고 공식 발표해 국제사회를 동요하게 했다.
통신은 “태양절을 맞는 뜻 깊은 시기에 조선의 과학자들이 핵융합 반응을 성공시키는 자랑찬 성과를 이룩했다”며 “핵융합의 성공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조선의 첨단과학기술의 면모를 과시하는 일대 사변으로 된다”고 주장했다.
통신에 따르면 북한의 기술자들은 핵융합 기술을 자체 개발하기 위한 연구를 지속해왔다. 이 과정에서 북한식의 독특한 열핵반응장치가 설계 제작되고 핵융합 반응과 관련한 기초연구가 완성되었으며, 마침내 100% 자체 기술로 핵융합 반응 실험이 성공했다.
1억℃ 이상의 고온에서 두 개의 원자핵이 융합해 하나의 무거운 원자핵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창출하는 핵융합 기술은 핵융합발전소 등 평화적 용도로도 사용되지만 수소폭탄(Hydrogen bomb) 개발에 사용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수소폭탄의 위력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를 초토화시킨 원자폭탄의 약 750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52년 미국이 첫 실험을 실시한 이래 수소폭탄은 급속한 진전을 보였으며, 1961년 구소련이 실시한 실험에서 절정에 달했다.
모스크바에서 제22차 공산당 총회가 개최되고 있던 1961년 10월 30일 오전 11시 33분경, 러시아 북서부에 위치한 면적 82,000여㎢의 섬 노바야젬랴(Novaya zemlya)에서 57메가톤급 폭탄 한 발이 폭발했다.
‘차르봄바(Tsar Bomba)’라 명명된 이 수소폭탄은 폭발 직후 39나노초(1나노초는 10억분의 1초)라는 짧은 시간에 같은 시간 동안 태양이 방출하는 에너지의 약 1%에 달하는 엄청난 열에너지를 방출했으며, 직경 10여km에 이르는 구덩이를 형성했다. 폭심지로부터 직경 64km내에 존재하던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100km 반경 내의 모든 동식물이 3도 화상을 입었다. 폭발의 열기는 800km 바깥까지 전달되었으며, 높이 60km 너비 40km에 달하는 버섯구름에서 발생한 충격파는 1,000km 이상 떨어진 핀란드에까지 몰아닥쳤다. 수소폭탄은 이처럼 엄청난 위력을 가진 존재이다.
수소폭탄에 관한 증언에 앞서 황 전 비서는 작년 말 자유북한방송에 평양 지하 깊숙한 곳에 은폐된 땅굴기지의 실체를 증언하는 등 흑막에 가려진 북한의 실체들을 외부세계에 알리는데 공헌해왔다. 당시 땅굴과 관련한 그의 증언은 국내외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정부의 정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 날 황 전 비서의 증언 또한 충격의 연속이었다.
“(북한의 수소폭탄 기술이) 그 이상으로 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실태도 모르는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이 북한의 기술력을 압니까?”
황 전 비서는 북한의 핵융합 발표 이후 나온 국내외 소위 ‘전문가’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12일 기자간담회에서 “비밀리에 (핵융합) 시설을 만들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으며, 필립 크롤리(Philip Crowley) 미국 국무부 공보담당차관보도 워싱턴 현지시간으로 12일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은 때때로 그런 식의 주장을 해왔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중국의 장롄구이(張璉瑰) 공산당 중앙당교 교수도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북한이 이번 발표에서 김일성의 생일(4월 15일) 등 시기를 강조한 점을 근거로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주장일 뿐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러나 황 전 비서에 따르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기술은 이미 상당 수준에 올라 있다.
“조만간 (수소폭탄 생산이 시작된다고) 발표할 수도 있습니다. 한꺼번에 발표하지 않는 이유는 (국제사회로부터의) 보복타격이 두려워서입니다. 북한은 처음부터 (수소폭탄을) 연구해왔습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대북(對北)경수로 건설사업이 시작된 90년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북한은 이미 경수로를 이용한 핵무기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원자력총국장은 황 전 비서에게 주변국의 통제만 없다면 경수로를 이용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고 보고했다.
경수로(輕水爐)는 경수(輕水)를 감속재와 냉각제로 사용하는 원자로이다. 대북 경수로 건설사업은 1994년 미북(美北) 제네바 합의에 따라 시작되었으며, 총 공사비 15억6,200만 달러 중 한국 정부가 11억3,700만 달러를 부담한 가운데 1997년 8월 본격 착공되었다. 이후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시 중단되었으며, 2005년 말 공정률 34.5% 상태에서 완전 종료되었다. 사업이 진행된 약 10년 동안 국제사회는 제공된 경수로로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으나, 이는 철저한 오판이었다는 것이 황 전 비서의 설명이다.
이런 와중에도 여전히 대북 경수로 사업 재개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끊이질 않고 있다. 제네바 합의를 도출한 미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 전 장관은 2008년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초청연설에서 “북한이 진정 핵무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으로 믿는다”며 경수로 2기만 제공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다.
사실 황 전 비서의 북핵 관련 증언은 이 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 3월 말에도 자유북한방송과의 대담에서 평화공세 속에 감춰진 북한정권의 핵(核)음모를 폭로했다. 당시 그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우리가 모르고 있던 사이 이미 까마득한 과거부터 시작되어 진행되어오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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