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가 일궈낸 영적인 옥토에 주님은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셨다. 바로 ‘노예 해방’이다.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영국인들은 심령에 찔림이 있었다. ‘똑같은 인간인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파는 것은 마땅한 일인가?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1781년 ‘종(Zong)호 사건’은 전환점이 되었다. 사건 개요는 이랬다.
당시 리버풀에서 자메이카로 가는 노예무역 선박에서 보급과 위생에 문제가 생겼다. 선장은 133명의 노예를 바다로 던졌다. 법적인 분쟁이 생겼고 법원은 판결을 내렸다. “화물을 버렸을 뿐이다. 사람을 죽인 건 아니다” 피도 없는 판결, 잔인한 결정이었다. 구령(救靈)의 열정에 불타기 시작한 영국인 스스로 회의에 빠졌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가?’
7년 뒤인 1789년. 그 유명한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노예무역폐지협회’를 발족했다. 말년의 웨슬리도 이를 격려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16세기 이래 영국의 가장 큰 사업 중 하나는 노예무역이었다. 250년 간 300만 명 이상의 흑인을 노예로 팔았다. 신대륙 일대에 커피와 설탕 생산에 필요한 인력을 대줘야 했던 탓이다. 18세 이후엔 전 세계 거래 노예 40%를 대줬던 나라가 영국이다. 산업혁명 이후 돈을 벌기 위해 뭐든 다 하던 때였다.
레닌이 그랬다. 혁명엔 일관된 논리와 헌신적 운동가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그런 면에선 예수혁명 역시 비슷하다.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헌신적 의인의 선포는 세상을 바꿨다.
1807년. 드디어 영국에서 노예무역(奴隸貿易)이 폐지됐다. 경건한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끌어낸 승리였다. 영국은 노예무역 폐지 이후 아예 해군이 앞장서 노예무역 단속에 나섰다. 1850년 브라질에서 노예무역을 중단시켰고 6년 뒤 영국 해군의 노예무역 단속함대는 ‘대서양 노예무역 종식’을 선언한 뒤 공식 해산했다. 자유무역과 세계평화를 수호할 미션을 갖춘 진정한 십자군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1807년~1867년 사이 영국 해군이 노예무역 단속을 위해 사용한 비용은 GDP 2%에 달했다. 감시활동에 투입된 군함은 전체 함정 수의 1/4에서 1/6. 엄청난 수였다. 그리고 드디어 1833년, 노예무역에 이어 노예제도(奴隸制度) 자체가 폐지됐다. 그리고 30여 년 뒤인 1863년 신대륙 미국에서도 링컨 대통령에 의해 노예제도가 사라졌다. 조선에선 백성을 당나귀 가격에 사고팔던 시대였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영국의 도덕적 결단이 위선(僞善)일 뿐이란 비판을 가한다. 장사가 잘 안 돼는 노예무역을 그럴싸한 명분으로 중단한 것이라는 요지다. 그러나 영국의 넬슨 제독이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를 격퇴한 뒤 전 세계 노예무역을 독점한 상태였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노예무역을 통한 이익도 GDP 10%를 넘었다.
노예가 생산한 설탕과 커피에 대한 수요도 여전히 높았다. 세이무어 드레셔(Seymour Drescher) 같은 학자는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를 일종의 스스로 가해진 경제적 학살(self-inflicted econocide)이라 부른다(Seymour Drescher, ‘Econocide: British Slavery in the Era of Abolition’ 中). 국가적 자살이란 표현이다.
당장의 손실을 각오한 배경엔 복음(福音)이 있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고 기쁘고 온전한 뜻을 쫓아가는 선한 마음이 있었다(롬 12:2).
실제로 1807년 영국 맨체스더 거주 남성 2/3가 노예무역 종결 청원서에 서명했고 1814년에는 영국인 75만 명이 노예제 폐지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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