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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지도부의 위기 대처 인식이 안이하기 짝이 없다. 곳곳에서 불거지는 부패와 노선 갈등으로 조직이 존폐의 기로에 서 있는데도 여전히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 간부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처 방식이 이를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엊그제 이 단체는 성폭력 사건에 관한 자체 조사보고서를 공개했다. 여론의 비난이 쏟아진 사건이었기에 국민들은 민주노총 스스로가 실체적 진실을 밝혀주기를 기대했다. 진보 세력을 자처하는 이 단체의 양심에 거는 일말의 기대이기도 했다. 민주노총 측도 “이번 사건을 환골탈태의 계기로 삼겠다”며 철저한 진상조사를 다짐했었다. 하지만 공개된 내용은 껍데기뿐이었다. 사건의 진상은 온데간데없고 변명만 가득했다. 조직적 은폐 의혹에 대해 “몇몇 간부의 문제지, 조직 전체의 의사는 아니었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특히 은폐를 조장한 것으로 알려진 전·현직 간부 2명의 신상을 끝내 공개하지 않은 것은 말도 안 된다. ‘우리가 감추면 누가 알겠느냐’는 오만이 엿보인다.
더욱 가관인 것은 사건 경위와 은폐 조장 등 핵심 사안에 관한 내용 공개는 검찰 수사 발표 뒤로 미루었다는 점이다. “수사 중인 사건이라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한 것”이라는 게 그 이유다. 하지만 이는 사건을 축소 은폐해 보려는 얕은 꼼수에 불과하다. 검찰이 밝혀내지 못하는 문제점은 끝내 덮고 넘어가겠다는 의도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자체 조사 내용이 검찰에 빌미를 제공할까 봐 몸을 사리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번과 같은 보고서라면 차라리 공개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민주노총의 철저한 자체 조사와 자성을 기대했던 국민들을 또 한번 우롱하는 처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이제라도 조사 내용 전체를 공개해야 한다. 그것도 검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공개해 사건 규명에 솔선하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수사를 받고 있는 당사자들 외에 이번 사건에 연루된 혐의가 있는 인물들을 알고 있다면 스스로 검찰에 고발하는 적극성도 보여야 한다. 이것만이 ‘민주노총이 적어도 도덕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기울이고 있구나’ 하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주는 길이다. 혹여 이번 사태를 적당히 모면해 볼 심산이라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을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가뜩이나 부패와 정치 투쟁에 염증을 느끼고 조직을 이탈하는 산하 단체들을 더욱 자극시킬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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