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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평양에서 본격 개막된 당대표자회가 펜과 칼의 권력다툼 양상을 다분히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초 9월 초 시작될 예정이었던 당대표자회는 까닭 없이 미루어지다가 약 한 달 만에야 비로소 막을 올렸다. 게다가 개막을 앞두고 평양 인근에 대규모 병력과 기갑부대 등이 전개되었으며 개막 직전에 장성택, 김경희, 최룡해 등 군(軍)과는 거리가 먼 당(黨) 인사들이 인민군 대장에 임명되었다.
평양 인근의 병력 전개를 놓고 일각에서는 당대표자회를 앞두고 대규모 열병식 및 군사퍼레이드를 펼치기 위한 의도일 것으로 추정했으나 이는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 10월 10일 당 창건 65주년 기념식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는 추측도 있으나 과거 열병식에 비해 2배가 넘는 병력이 동원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기념식을 위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열병식을 구실로 모종(某種)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평양을 방어하거나 군이 아직 당의 통제 하에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서 후계자 섭정(攝政)을 노리는 군부(軍部) 내 위협세력의 기선을 사전제압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당대표자회를 앞두고 평양방어사령관 출신의 총참모장으로서 김정일 가계(家系)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리영호 대장을 차수로 승격시킨 점은 후자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리영호는 이번 인사로 김영춘 국방위 부위원장(인민무력부장)과 직급상 동급이 되었다. 김영춘은 오극렬 국방위 부위원장과 함께 후계자 김정은을 생모(生母)인 고영희의 생존 시절부터 지원해왔으며 군부가 당을 누르고 대외정책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2008년을 전후로 국방위 부위원장과 인민무력부장에 임명되는 등 권력욕을 드러내온 인물이다.
장성택 등의 대장 내정 인사도 이번 당대표자회가 펜과 칼의 권력다툼의 장(場)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이들 당 인사는 대장으로 임명됨으로서 역시 마찬가지로 오극렬과 동급이 되었다. 앞서 장성택은 군부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국방위원회에 당 계열로는 유일하게 부위원장으로 내정된 바 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 따르면 김정일은 대학 재학 시절인 60년대부터 이미 군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선군(先軍)을 등에 업고 오랜 기간 권력을 키워오다 김정일의 와병(臥病)과 건강 악화를 계기로 2008년부터 권력의 선두에 서기 시작한 군부에 당이 맞설 수 있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두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사망인 것으로 보인다.
군의 조직과 인사 업무를 담당해왔으며 올해 4월 사망한 리용철과 당의 조직과 인사 업무를 관장해왔으며 6월 사망한 리제강은 김영춘, 오극렬과 마찬가지로 고영희 생존 시절부터 김정은의 후견인이었다. 30여년간 조직지도부에서 일한 리제강은 과거 장성택 숙청을 주도했을 정도로 반(反)장성택 파의 핵심인물이었으며 리용철은 그와 협력관계였다.
조직지도부는 당군(黨軍)의 인사를 총괄하는 ‘당 속의 당’이다. 그러한 조직지도부에서 오래 묵은 범이라 할 수 있는 두 수장(首長)을 제거함으로서 인사 업무의 주체가 사라지자 비로소 당 인사들이 군의 요직까지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각각 심장마비와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들은 의도적으로 암살되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다분하다.
그러나 펜의 반격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현재 헌법 상 최고권력기관인 국방위원회는 여전히 군부 인사들이 대다수 장악하고 있다.
특히 김영춘은 인민무력부장 직책을 유지하고 있으며 더구나 오극렬은 김영철 정찰총국장의 직속상관으로서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 인민무력부 소속인 정찰총국은 대남 공작기관인 노동당 작전부와 35호실, 인민무력부 산하 정찰국이 통폐합된 기관이다.
또한 군부 출신으로서 국방위 위원인 우동측 보위부 수석부부장과 주상성 인민보안부장이 보유한 무력도 만만치 않다. 이들 병력은 중화기를 갖췄지만 복잡한 명령하달 절차를 거쳐 먼 거리를 움직이는 야전부대와 달리 소(小)화기로 무장했지만 짧은 거리를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 계열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장성택이 이르면 수년 후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김정일 사후(死後)에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우선 김정일의 매제라는 후광이 사라진다. 아내인 김경희가 김정일의 누이이자 김일성의 친딸이기는 하지만 소위 ‘백두혈통’은 남성 중심적인 개념이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도 김경희에 대해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비록 후계자 김정은의 고모부(姑母夫)라는 친척 관계가 성립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장성택의 백두혈통화(化)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안의 최종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후계자 김정은에게 있다. 황 전 비서에 따르면 김정일도 과거 후계자 내정 이후 직계(直系)가 아닌 친척들을 가차 없이 숙청한 사례가 있다.
결국 군부가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제 막 정치에 발걸음을 내디딘 약점을 활용해 김정은을 움직이게 된다면 펜의 반격도 끝나게 되는 것이다.
군부는 오랜 기간 김정은을 지원해왔으며 그만큼 김정은의 정치적 약점도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이 생모 고영희에 대한 향수와 정(情)에 이끌려 진심으로 군부를 따르게 되거나 어떠한 정치적 압박에 의해 군부를 따르게 되거나 어떠한 경우에도 군부는 혹 있을지 모를 친(親)장성택 성향의 병력이 움직이기 전에 정찰총국과 보위부, 인민보안부와 같은 병력을 동원해 신속하게 장성택을 체포구금할 수 있다. 실제로 장성택은 김정은이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던 김정남을 과거 지원했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비록 친중(親中)파인 장성택의 개혁개방 성향이 민심(民心)을 얻는다 하더라도 군부가 장성택의 반역 혐의 등을 거짓으로 꾸며내 대의명분을 세운다면 주민들로서는 저항의 여지가 사라진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하루 끼니 걱정에 바쁜 주민들은 다만 3대 세습에 비판적 입장일 뿐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의지는 빈약하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수가 김일성의 향수에 젖어 있다. 장성택이 김일성을 부정하고 장(張)씨 왕조를 열려고 했다는 군부의 거짓선전 앞에 주민들은 오히려 장성택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설 수 있다. 북한은 과거에도 90년대 대량아사(餓死) 사태가 발생하자 당 농업담당비서였던 서관히에게 미국의 간첩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누명을 씌워 처형한 사례가 있다.
만약 김정은이 따르지 않는다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군부는 마찬가지로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 가능하다면 거사가 끝난 뒤 김정은의 친형 김정철을 새 지도자로 내세워 섭정에 돌입할 수 있다.
2.
변수는 북한군을 야전에서 지휘하는 총참모장 리영호와 중국의 반응이다.
평양방어사령관 출신인 리영호는 여전히 평양 방어 전력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지방에 주둔 중인 야전부대는 기동성이 느리다 하더라도 평양 안팎에 배치된 평양 방어 전력은 그렇지 않다.
만약 김정은이 군부를 따르지 않는 상황 또는 따른다 하더라도 장성택이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통신 체계를 두절시킨 상황 속에서 리영호가 군부 인사들의 움직임을 반란으로 규정, 전력을 움직인다면 북한은 평양 시가전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최고사령부 직속 통신부대 장교 출신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평양의 지하 땅굴과 같은 특정 지역은 ‘비화(非和)교환수’들이 안팎의 통신을 연결한다. 김정은이 땅굴 등 특정 지역에 머무는 상태에서 통신을 장악할 수 있다면 장성택은 사태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참고로 이 탈북자에 의하면 북한 군부 내에는 권력 찬탈을 노리는 세력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는 인민무력부 소속 처장(處長)들이 암호로 통화하는 내용도 도청한 바 있다고 한다).
중국의 반응도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북한 체제를 공고히 하고 중국화(化)함으로서 미국을 막으려 하는 중국으로서는 이 같은 혼란, 더구나 친중파인 장성택의 위험을 달가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 같은 북한의 혼란을 호기(好機)로 본 한미(韓美) 양 국이 북한 내부에 자유통일을 위한 공작을 전개할 여지는 다분하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 따르면 중국은 북한에 대한 내정간섭은 피하려하는 경향이 높지만 한미 양 국의 움직임 앞에 불가피하게 베이징(北京)과 마카오 등지를 전전하는 김정남을 앞세워 깊숙이 개입할 수 있다.
3.
북한이 굳이 당 인사들을 군의 요직에 앉혀가면서까지 당군(黨軍) 양 측의 대립을 촉발시키는 이유는 그만큼 군부의 권력 장악 위협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정은 시대에 이루어질 군부의 섭정은 장기적으로 김일성으로부터 이어지는 김씨 왕조(王朝)의 맥(脈)을 위협함은 물론 군부 특유의 호전(好戰)적 기질로 인해 북한 체제의 붕괴를 불러올 수도 있다. 과거 군부의 힘을 이용해 권력을 누려온 김정일이지만 이제는 자신의 통제력을 벗어나버린 군부에 의해 자신의 후손들이 꼭두각시가 되는 것을 원치는 않을 것이다. 또 군부에 의해 체제가 붕괴되어 후손들이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것도 원치 않을 것이다. 때문에 죽음이 머지않은 지금 이처럼 복잡한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로서는 당군(黨軍) 양 측의 권력 투쟁이 딜레마가 될 수밖에 없다. 군부가 섭정을 시작한다면 지금보다 더 큰 군사적 위협 앞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군부는 이미 불과 2~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황강댐 수공(水攻)과 금강산 관광객 사살, 천안함 격침 등의 수많은 대남 테러를 자행해왔다. 경제가 아닌 폭력에 의한 부흥을 꿈꾸는 군부 집권 하에서는 북한 주민들의 고통도 그만큼 가중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성택의 섭정이 우리에게 바른 선택이 될 수는 없다. 군사적 위협은 덜해진다 하더라도 친중파인 장성택의 북한은 자칫 중국화(化)로 흘러갈 수 있다. 북한이 중국의 동북4성으로 자리매김한다면 민족의 염원인 통일은 사라지게 된다. 또한 북한을 거치고 만주(滿洲)를 거쳐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대한민국의 원대한 구상은 빛을 잃게 된다.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며 그들의 내부 분란을 북한 체제 붕괴의 호기로 삼는 지혜와 인내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체제가 붕괴된다면 군사적 위협도 사라지고 통일도 가능하게 된다. 비록 북한 붕괴와 맞물리는 중국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이라는 이후의 위험도 있지만 그 문제는 한미 양 국의 능력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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