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북한 군부(軍部)가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대남 전면대결’을 선언한데 이어 23일 김정일이 왕자루이(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접견한 자리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지지하고 한반도 정세의 긴장상태를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리고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의 친서를 전달받고 “북중 관계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모두 매우 중요하다”며 “북중 우호의 전통을 계속 이어나가자”고 강조한 뒤 중국 방문을 흔쾌히 승낙했다.
 
전면대결과 긴장완화.
 
뭔가 앞뒤가 맞지 않고 전혀 조화롭지 않은 두 개의 표현이다.
 
북한은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 ‘전술’을 사용하는 것일까?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들을 제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김정일이 군부를 앞세워 대남 전면대결을 선언함으로서 출범을 수 일 앞둔 오바마 행정부를 압박한 뒤 자신은 마치 ‘1~2차 연평해전을 일으키고 금강산 관광객을 살해한 바 있는 강경한 철부지’들과는 달리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원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당근과 채찍’ 전략으로 미국을 혼란시켜 협상력을 높이는 한편 유사시 중국이라는 ‘안전판’을 확고히 다지려는 의도일 가능성.
 
둘째, 약 반 년 동안 뇌졸중으로 인해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자신의 건강을 대내외에 확인시키고 체제 장악력을 과시하는 한편 오랜 혈맹인 중국과의 결속력을 다지려는 평범한 의도일 가능성.
 
셋째, 김정일이 자신을 젖히고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1면 보도를 차지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져 통제 불가능에까지 이른 군부를 견제하는 한편 북중 동맹의 재확인을 통해 군부의 폭주에 제동을 걸고 중국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한 의도일 가능성.
 
넷째, 이 중 두세 가지가 종합된 의도일 가능성.
 
이러한 네 가지 가능성 중 세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각 계에서 이미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중 세 번째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정남은 왜 유례없는 장시간 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권력 승계의 결정권은 부친에게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누차 강조했을까?
 
23일 김정일이 왕 부장과 접견한 뒤 이튿날, 그의 장남인 김정남은 마치 미리 짜고 맞추기라도 한 듯 북한 고려항공편으로 베이징 서우두(首都) 공항에 도착한 직후 전례가 없는 장시간의 즉석 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의 후계구도는 아직 정해진 것이 없고 그것은 전적으로 부친(김정일)의 결정 권한”이라고 밝혔다.
 
김정남은 이 날 후계 문제에 대해 “부친이 결정할 일”이라는 입장을 두 차례에 걸쳐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또 불과 3일 뒤인 27일 다시 같은 장소에서 외신 기자들과의 인터뷰에 응해 “(김정일의 승계자는) 아무도 알 수 없다”며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김정남은 왜 이렇게 외신 기자회견이라는 파격적인 자리를 마련하고 ‘후계 구도의 결정권은 김정일이 갖고 있다’는 뻔한 내용을 새삼 강조했을까?
 
외부에서 어떻게 몰아가든 간에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폐쇄된 지역인 북한의 후계 구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북측은 절대 권력자인 김정일의 결정에 따라 후계자를 정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김정남은 장시간에 걸친 외신 기자회견에서 ‘후계구도는 김정일의 결정권’이라는 것을 세 차례에 걸쳐 누차 강조했다.
 
이미 널리 알려지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김정남은 김정일의 매제이자 친중(親中)파인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및 김정일의 세 번째 정부(情婦)인 김옥 국방위원회 과장의 지원을 받고 있다. 또 이들 그룹은 군부와 정치적 연대를 가졌던 김정일의 두 번째 정부인 고영희(2004년 사망)에게서 난 ‘샛별장군’ 정철(혹은 정운)을 지원하고 있는 군부와 심각한 라이벌 관계이다.
 
군부와 장성택 그룹의 갈등은 한 때 제1부부장으로 막강한 권한을 지녔던 장성택이 군부 인사인 리제강, 리용철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입김에 의해 숙청당해 행정부장으로 강등당한 사실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 동안 김정일의 선군정치(先軍政治) 노선에 의해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오던 군부가 남북관계에까지 전면에 나서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작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 故 박왕자 씨가 북한군 초병에 의해 현지에서 살해당한 직후이다.
 
군부는 작년 8월 3일, ‘인민군 금강산지구 군부대 대변인의 특별담화’를 통해 “‘불필요한 남측 인원들’을 모두 추방하고 금강산 지구에 들어가는 남측 인원과 차량들의 군사분계선 통과를 ‘보다 엄격히 제한통제’하며 앞으로 금강산 지구의 관광지와 군사통제구역 안에서 나타나는 ‘사소한 적대행위’에 대해 강한 군사적 대응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인민군 금강산지구 군부대 대변인의 특별담화 시기는 일본 교도통신(共同通信)이 미국 정부 고위관리를 인용해 김정일이 뇌졸중을 일으켜 쓰러졌을 것으로 추정한 8월 중순과 거의 맞아떨어지는 시기이다. 
 
군부는 이어 9월 9일 정권수립 60주년 행사에 정규군을 불참시키는 이상 행동을 보였으며 10월 9일 해군 사령부 담화를 통해 “남측의 영해(북측이 서해에 일방적으로 설정한 북방한계선) 침범에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고 경고한 뒤 11월 6일 남북 장성급 회담 북측 단장인 김영철 국방위원회 정책국장(인민군 중장)을 개성공단에 파견해 철수를 종용했다.

그리고 11월 24일 남북 장성급회담 단장 전통문을 통해 “12월 1일부로 개성관광을 중단하고 공단의 상주인원을 축소할 것”이라고 밝힌 뒤 12월 1일 미리 경고한대로 남측 인원의 육로 이동을 대폭 축소하는 12.1조치를 끝내 단행한데 이어 같은 달 17일 김영철 정책국장을 개성공단에 재차 파견했다.
 
17일 군부의 개성공단 방문 당시 분위기와 관련해 한 참석자는 20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영철은 대뜸 못마땅한 표정으로 군 인사를 제외한 북측 공단 관계자와 경제 및 대남 관리들의 퇴장을 지시했다”며 “군부의 힘을 생생하게 느꼈다”고 전했다. 
 
선군정치는 결국 ‘범(虎)의 새끼’를 키운 꼴
 
군부의 ‘생생한 힘’은 지난 19일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이 김정일의 동정을 2면으로 미루고 대신 군부의 총참모부 성명을 1면에 내세우는 파격적인 편집을 선보인 것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단 하나의 절대 권력자가 체제의 중심을 이루는 북한에서, 북한 최고의 언론매체이자 북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노동신문의 1면은 곧 절대 권력자가 누구인지를 상징한다. 비록 사진으로나마 김정일이 대외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가운데 돌연 그의 소식을 2면으로 밀어낸 것에 대해 한 정보 당국자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군부의 행보는 모두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발생했으며, 특히 일본 민영방송인 TBS에 의해 김정일이 두 번째 뇌졸중 발작을 일으켜 쓰러진 것으로 전해진 작년 10월 하순경 이후 군부는 김영철 중장을 개성공단에 파견하면서까지 지난 기간 김정일이 야심차게 추진해왔던 개성공단의 중단을 시사했다.
 
따라서 이러한 군부의 행보에 마치 제동을 걸기라도 하듯 이루어진 이번 김씨 부자(父子)의 연이은 면담과 기자회견은 다음과 같은 의도로 해석될 수도 있다.
 
즉, 김정일이 현재 통제 불가능에 빠져 폭주하고 있는 군부의 완전한 권력 장악을 막기 위해 왕 부장과의 면담과 방중을 통해 자신의 건재함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한편, 장남의 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후계 결정권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시키는 동시에 군부와 라이벌 관계인 장성택 그룹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원하는 중국으로서도 군부의 집권은 달갑지 않은 현실이기에 반드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것이라는 이들 부자의 계산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철통같은 ‘비밀’의 장막에 휩싸여 있는 北체제의 특성상, 그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은 지난 94년 7월 8일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인한 사망 발표에서도 알 수 있듯 체제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일은 외부의 그 누구도 짐작치 못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비록 94년 당시와 비교해 약 15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의 북한은 탈북자들이 뇌물을 통해 북중 지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오고가고 있고 중국을 통해 휴대전화가 밀반입되는가 하면 장마당이 들어서는 등 상당히 변모했다고 해도 김정일의 지독한 독재 통치로 인해 오히려 획일적 수직 형태의 권력 구도는 그 때보다 더욱 더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 권력층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오로지 그들 극소수의 ‘핵심들’만이 알 수 있으며, 때문에 상단에서 언급한 네 가지 가능성과 같은 다양한 예상들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현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지금 북한은 김정일의 뇌졸중 발병 이후 군부가 남북관계의 전면에 나서서 대남 전면대결을 선언한데 이어 다시 김정일이 나타나 한반도 평화를 강조하고 김정남이 전례 없는 장시간의 외신 기자회견을 갖는 등 마치 김 씨 부자와 군부의 줄다리기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말년의 김일성도 그 자신이 93년 국방위원장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주어 권력 실세로 등극시켰던 김정일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남북 정상회담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등 처절한 권력 투쟁을 벌이다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북한 체제의 특성 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추측’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추측들 중 어느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는 이것에 대해 만반의 대응 태세를 갖추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군부의 권력 장악 가능성도 배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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