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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김남조-
이 시(詩)는 6.25전쟁이 발발한 해인 1950년 시 ‘성숙’ 등으로 등단해 2007년 제11회 만해대상을 수상한 김남조(83) 시인의 작품 ‘설일(雪日)’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김 시인은 기독교적 인간애와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사랑과 인생을 섬세한 언어로 형상화해 ‘사랑의 시인’으로 불리는 계관(桂冠)시인이다.
그는 지난달 14일 청와대 국민원로회 위원 초청 간담회에서 “6.25 동란 당시 서울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밝힌 뒤 “대한민국은 네 번을 당기고 밀려서 서울을 지켜냈다”고 강조하면서 국민들의 애국을 호소한 인물이다.
6.25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전란의 와중에 등단했기 때문인지 김 시인의 작품 ‘설일’에는 명절의 기쁨보다도 민족의 애절함이 많이 깃들어 있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시인은 작품에서 그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90년대 중후반 북녘 주민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약 30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남은 가족들은 떠난 사람의 시신을 동토(凍土)에 묻으며 눈물도 함께 가슴에 묻어야 했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주민들의 몫이었다. 정권도, 국제사회도, 그 누구도 그들의 아픔을 함께하지 않았다. 심지어 좌파정권이 들어선 남한도 동족의 고통을 외면해버렸다. 북녘 주민들에게 있어서 의지할 곳이라고는 오직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파아란 하늘뿐이었다.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북한 주민들의 삶은 돌층계로 첩첩히 쌓아올려진 신(神)의 은총에 있어서 제일 첫 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한 주민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자갈밭처럼 무수히 흩뿌려진 신의 섭리에 있어서 존재조차 찾을 수 없는 작은 모래알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인은 말한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절망은 더 큰 절망을 낳을 뿐이다. 가족을 잃은 북한 주민들은 정권의 탄압으로 인해 10년간 쌓아올린 재산마저 모두 잃어버렸다. 남은 것은 현재에 대한 절망과 고통, 그리고 피눈물뿐이다. 하지만 절망은 사치이다. 그들에게는 필연(必然)적 미래가 있기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2010년 새해. 그들이 흘렸던 눈물, 새까맣게 멍든 가슴 속 고통의 배출이었던 그 눈물은 이제 곧 하이얀 희망의 백색으로 색바꿈하여 그들의 가슴 속에 스며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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