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역시 기도의 열매다.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된 후 낙동강 전선만 간신히 지키던, 말 그대로 풍전등화(風前燈火)의 때였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외에는 믿을 분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 요구로 피난 온 250여명의 목사들과 장로들은 부산 초량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시작했다. 1050년 8월 하순. 당시 집회 강사로는 한상동 목사, 박형룡 목사, 박윤선 목사가 맡았다. 이내 울음바다가 되었다. 초량교회에 모인 목사들은 성도들을 버리고 부산까지 흘러온 죄책감,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했던 죄악 그리고 생각, 감정, 기분에 뿌리내린 죄성들을 통회하기 시작했다.
통곡, 애곡, 비명이 터졌다. 목사로서, 장로로서, 집사로서. 위선과 탐심, 교만의 죄를 회개했다. 집회는 두 주 동안 밤낮없이 계속됐다. 당시 초량교회는 한강 이남에서는 가장 큰 교회였다. 주기철 목사를 거쳐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교회였다. 교회엔 의자도 없었다. 목사들은 마룻바닥에 꿇어 앉아 울부짖었다. 평양 대 부흥회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성령께서 역사하셨다. 죄를 자백한 자 그렇게 심령의 천국이 임한 자에게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 죽임이 아닌 살림, 지옥의 군대를 내쫓는 해방이다.
부산 초량교회당 기도회 3일 뒤 국가 차원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 성공확률 5,000분의 1. 기적이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했던 자에게 주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이다. 선택할 여지가 없는 벼랑 끝에 선 이들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을 받는다. 필자가 아는 90대의 한 권사님은 6.25당시 대구의 아버지 교회에서 경험한 체험을 이렇게 말한다.
“전쟁 나고 대구까지 국군이 밀리자, 대구에 있던 저희 교회에선 매일 밤 부흥회를 열었어요. 기도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먹을 것이 많지 않아 금식인지 단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살려달라고... 용서해달라고 부르짖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습니다. 헌데 얼마나 기적이 많이 일어났는지... 전쟁터에서 거의 죽게 된 병사가 일어나고 죽을병이 고쳐지고 하나님의 기적들이 정말 많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심판 앞에서 회개 외에는 길이 없다. 그러나 미쁘신 주님은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불법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며 이 땅을 고치시는 분이시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역대 하 7:14)”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6.25 판세가 바뀌고 연합군은 북진하기 시작했다. 서울 수복 다음 날인 9월 29일 12시, 수도 서울 환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류의 가장 큰 희망의 상징인 UN의 깃발 아래 싸우는 우리 군대는 한국의 수도 서울을 해방하게 되었습니다.”라고 감격했다.
전쟁이 끝나고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동포들을 향해 연설했다. “당분간 공산압제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우리들의 동포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 민족의 기본 목표 즉 북쪽에 있는 우리의 강토와 동포를 다시 찾고 구해내자는 목표는 계속 남아 있으며 결국 성취되고야 말 것입니다(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조인 당시 연설)”
이 민족의 가야 할 길, 해야 할 일. 수많은 순교의 피를 통해 확인된 부르심을 다시 확인하였다. 강토와 동포를 다시 찾고 구해내는 것. 하나의 영적 강대국, 기독교한국이 되어 선교하는 것. 예수님 다시 오실 길을 예비하는 것. 그것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