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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세계 공산화 전략'
김정일 제거 못하면 남한은 물론이고 미국-일본도 재앙을 맞게 될 것.

 北, 전 세계 테러·공산화의 전진기지
 
 베트남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69부터 1980년대 초까지 북한은 ‘대남적화’를 목표로 한 ‘국제적 혁명역량’ 강화의 일환으로 소규모 테러조직을 남파시켰다.
 
 당시 북한을 포함한 국제 공산세력의 목표는 베트남을 제1전장으로 고정시킨 뒤, 한반도를 제2전장으로 만들어 공산주의를 확산시켜 ‘온 세계의 공산화’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국제공산 세력은 북한을 필두로 중국·러시아뿐만 아니라 한국·미국·일본에도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국내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두 차례의 암살기도였다. 첫 번째 시도는 1970년 6월에 일어났는데, 3명의 행동대원들이 6월25일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 전에 국립묘지의 문에 원격조종되는 거대한 폭탄을 감추기 위해 잠입했다. 연설 3일 전 행동대원들은 폭탄을 설치하기 위해 국립묘지에 들어갔다.
 
 그런데 무엇인가 잘못되어 폭탄이 갑자기 폭발하는 바람에 1명의 행동대원이 죽었다. 살아남은 행동대원들은 재빨리 도주했으나 국군에 의해 2주 후 진압됐다. 4년 후인 1974년 8월15일 북한은 세 번째로 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기념사를 하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박 대통령은 해를 입지 않고 피했으나 육영수 여사와 합창단 소녀가 살해됐다. 암살자 문세광은 박 대통령의 경호원에 의해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
 
 계속된 대한민국 보안요원들의 심문 과정에서 문세광은 자신이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사결과 그는 1974년 일본에서 조총련 오사카 지부의 일원에 의해 북한 공작원으로 발탁된 인물임이 밝혀졌다.
 
 1973년 11월, 문세광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받았고, 다음해 5월 그를 감독해온 김호령으로 부터 일본 니가타 항에 정박한 북한 화물선 만경봉호에서 그의 마지막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8월6일 그는 위조된 일본 여권을 사용해 대한민국에 도착, 8월15일 택시를 타고 국립극장에 가서 일본 외교관처럼 행세하면서 극장에 들어간 뒤, 박 대통령에 대한 암살을 기도했다.
 
 국제적 수준에서 북한은 이 시기 ‘국제적 혁명(테러리스트와 공산혁명가 포함)을 위한 훈련의 하부구조를 확대시키는 데 있어 장족의 진보를 하게 되는데, 이는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 내 훈련시설을 포함 다수의 해외훈련 및 고문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평양의 용흥리를 포함 용변·상원·해주·남포·원산 근처에 산재해 있었다.
 
 특히 이들 해외훈련 및 고문단은 중동과 아프리카, 중남미 아메리카 등 제3세계 전역에 파송되어 있었다. 코스는 대체로 그 기간에 따라 두 범주로 분류된다. 단기 코스는 전형적으로 3개월에서 6개월간 지속되는데 사격술·통신·지도읽기·잠복과 대응잠복·폭파·사보타지·첩보·선전 및 심리전·납치·암살 그리고 테러리즘과 같은 기본적 기술 등에 집중되어 있다.
 
 장기코스의 경우 주로 북한 내에서 행해졌는데, 12개월에서 24개월간 지속되었고, 고도의 참모기술·통신·첩보·의료훈련 등에 집중되곤 했다. 모든 코스에서는 다량의 사상 주입이 수반됐다.
 
 1969년에서 1974년 사이 북한 내에서 훈련을 받은 국가 및 기구들은 대표적으로 이집트·과테말라·니카라과·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팔레스타인 해방대중전선(PELP), 태국·소말리아·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 우간다 등과 그밖에 수많은 국가 및 기구들이 있었다.
 
 해외훈련 및 고문단의 수혜국으로는 알제리·기아나·니카라과·탄자니아·우간다 외 수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1974년 말까지 북한 내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전체 수는 최고 3~4천명에 달했다. (출처: 조셉 S. 버뮤데즈, Jr. 북한과 테러리즘)
 
 해외훈련 및 고문단에 의해 훈련된 테러범들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북한 내에서 훈련된 사람들의 수를 쉽게 능가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국제적 테러리즘의 급속한 증가와 함께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기간 동안 북한은 계속 증가하는 테러 훈련 및 지원계획을 보조했다. 이렇게 지원이 확대된 것은 과거 북한이 북아프리카와 동아시아에서 성공을 보았던 결과이며, 그러한 활동들이 미국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일격을 가하는 수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결과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북한은 이러한 영역에서 북한 자신의 독립적 정책들을 추구하면서, 점차적으로 아메리카에서는 쿠바와 아프리카, 아시아에서는 구소련과 상호 협력했다. 중국과의 협력관계는 주로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진행됐다.
 
 이 시기 후반부는 북한이 ‘국제혁명역량 강화’를 위한 자원을 계속 확대시킨 시기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대한 공작이 주목할 만큼 감소한 시기다. 이 같은 전개는 다음 몇 가지 요인들에 기인했다.
 
 ▲김일성은 당내에서 그의 아들 김정일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전념하는 한편 자신의 궁극적인 통치권 장악을 확고히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 하에 대한민국의 보안력이 그 규모와 기술에서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됐다. 이러한 활동은 조총련을 겨냥한 일본 내 대북공작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대한민국에 대한 전복활동과 침입을 무력하게 할 수 있게 됐다.
 
 ▲북한은 증가하는 재정적 문제들 때문에 심한 곤란을 겪게 됐다. 동시에 북한은 주요한 군 현대화와 확대계획 뿐만 아니라, 제3세계의 테러리스트와 혁명기구들에 대한 지원 확대의 의무를 지게 됐다. 이때는 대한민국이 자신을 세계에 경제력으로써 과시하고 있던 때와 같은 시기였다.
 
 ▲북한 인민군은 중요한 재조직·현대화·그리고 확장을 겪고 있었으며, 여기에 거대한 양의 가용자원을 빼앗겼다. 예를 들면 특수 8군단의 인적규모는 1982년 약8만 1천명으로 증가했다. (북한의 특수부대 전력은 2009년 현재 18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한 책임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북퍼주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김정일의 권력 획득의 중요성은 김정일이 북한의 ‘국제혁명역량 강화’와 대남 전복활동에 대한 사실상의 지휘를 맡았던 1980년대 초기를 통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김일성은 스스로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국제혁명역량’의 마지막 단계를 ‘김정일의 등장’으로 봤다. 이를 위해 김일성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1970년대 말 동안 당 내에서 김정일의 위치를 강화하고, 자신의 궁극적인 통치권 장악을 확고히 하는 데 몰두했다.
 
 이 같은 목표아래 북한의 정보와 보안기관들이 재조직됐다. 이 모든 활동은 김정일이 북한의 주요 ‘국제적 혁명’과 대남전복활동에 대한 지휘권을 갖게 된 1980년대 초기 기간 동안에 일어났다.
 
 이중에서도 특히 막강한 대외정보조사부가 김정일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김정일은 북한의 최고 외교정책 수단의 하나로서 정치적 테러리즘을 확고히 하고 국제적 혁명가 및 테러리스트 기구들에 대한 지원을 확고히 하는데 그의 새로운 권력을 사용했다.
 
 과거에는 구소련과 중국 블록(BLOCK)을 통해 지원을 받았던 상당수의 테러리스트와 혁명기구들이 이제는 북한의 지원을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기구들이 어느 정도의 지원을 받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김정일 한 개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북한이 국제적 테러리스트와 혁명 기구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가공할 만한 규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매우 다양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다. 따라서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북한을 통치하는 한 국제적 테러 근절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김정일을 ‘식견 있는 지도자’로 칭송했던 김대중은 2001년 12월 6일 노벨평화상 제정 100주년 기념집회에서 “빈부의 격차 해결 없이는 21세기의 세계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전쟁과 테러의 원인은 빈부의 격차, 즉 가난한 자의 가진 자에 대한 원한 또는 반항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사마 빈 라덴은 빈궁해서 테러리스트가 되었다는 것인가? 김정일이 돈이 없어서 테러리스트가 되었다는 것인가?
 
 그러나 빈부의 격차와 상관없이 지금 이 시간 세계도처에는 북한에서 교육을 받은 테러리스트들이 활개치고 있다. 이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폭 테러를 일으키기도 하며 9.11테러와 같이 수천 명의 인명을 삽시간에 앗아가는 테러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제 자유 수호 세력은 김정일 독재를 부추기는 일체의 외부 지원을 차단하고 미일(美日) 자유세력과 연대해 김정일 제거를 위한 대북공작에 집중해야 한다. 이 기회에 김정일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남한은 물론이고 미국과 일본도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을 맞게 될 것이다.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주] 북한의 전 세계 테러지원 일지 및 각 연도의 사안을 아래에 열거한다.
 
 ▲ 1966년도
 。시리아 : 제3차 중동 전쟁 때에 1500명 파견.(조종사 25명 포함)
 。가나:군사 쿠데타 당시 다수파견
 
 ▲1967년도
 。베트남 : 2개 비행 연대 파견. 2001년 8월 북한최고인민회의 상임의장 김영남이 베트남 방문시, 그는 전사한 북한병사 묘에 참배하고 있다.
 
 ▲ 1970년도
 。시리아 : 전차병 200명. 조종사 53명. 미사일 요원 140명 파견.
 
 ▲ 1971년도
 。브라질 : 폴토·아레구레 게릴라 기지 설치. 게릴라 교관 13명 파견.
 。칠레 : 산체코에 게릴라 훈련소 설치. 게릴라 교관 파견.
 
 ▲ 1972년도
 。베트남:심리전 교란요원 다수파견.
 。남예멘(당시 공산정권) :게릴라 교관 20명 파견.
 
 ▲ 1973년도
 。팔레스타인 : 게릴라 교관 70명 파견.
 。캄보디아 :군사 교관 50명 파견.
 。이집트 : 미사일 요원 30명. 조종사 및 정비사 50명 파견.
 。아르헨티나 : 사파에 게릴라 기지 설치. 게릴라 교관 파견.
 
 ▲ 1974년도
 。이집트 : 테러 교관 5명 파견.
 
 ▲ 1975년도
 。자이레 : 군사 교관 125명 파견.
 。시리아 : 공군 교관 75명 파견.
 
 ▲ 1976년도
 。알제리아 : 게릴라 교관 파견.
 。레바논 : 레바논 내전에 특공대 파견.
 。기아나 : 게릴라교관 파견 800명 양성. 볼리비아, 우루과이, 콜롬비아에 침투. 로데이지아 흑인 게릴라 훈련 지도.
 
 ▲ 1977년도
 。토 고 : 게릴라 교관 50명 파견.
 。라오스 : 게릴라 특공대 파견.
 。페루 :테러 조종 지도 교관 파견.
 。에티오피아 : 군사 교관 파견. 민병 훈련.
 。리비아 : 군사 교관 파견.
 
 ▲ 1978년도
 。탄자니아 : 타보라에 군사 혁명 학교 설립하고, 게릴라 양성.
 。페루 : 게릴라 교관 파견.
 
 ▲ 1979년도
 。인도 : 반군 게릴라에 교관 파견하여 4명 체포됨.
 
 ▲ 1980년도
 。이란 : 군사 교관 파견.
 。알제리 : 게릴라 교관 파견. 인민 해방 전선 훈련 지도.
 。파키스탄 :전차 교관 15명 파견.
 
 ▲ 1981년도
 。니카라과 : 게릴라 교관 50명 파견.
 
 ▲ 1982년도
 。레바논 : 게릴라 교관 300명 파견. PLO 및 이슬람교 지역에서 12,000명 게릴라 양성.
 。이란 : 군사 교관 90명 파견.
 
 ▲ 1983년도
 。짐바브웨 : 게릴라 교관 130명 파견.
 
 ▲ 1984년∼86년도
 。팔레스타인 : 게릴라·살인 테러 훈련 교관 75명 파견.
 。시리아 : 군사 교관 50명 파견.
 
 ▲ 1987년∼89년도
 。볼리비아 : 게릴라·살인 테러 훈련 교관 40명 파견.
 
 ▲ 1989년∼91년도
 。키네비사와:군사 교관 48명 파견.
 。수단 : 군사 교관 60명 파견.
 。베닝 : 군사 교관 20명 파견.
 
 ▲ 1990년도
 。시리아 : 군사 교관 30명 파견.
 
  테러국가들에 수백만달러 지원
 
 ▲ 1966년도
 。베네수엘라 : 전국 해방 무장군에 5만 달러 지원.
 
 ▲ 1969년도
 。케냐 : 정부 전복 활동 자금 지원.
 
 ▲ 1970년도
 。브라질 : 해방 혁명 투쟁대에 5만 달러 지원.
 
 ▲ 1971년
 。인도 : 공산당 총선거 자금 150만 달러 지원.
 。스리랑카 : 반정부 게릴라에게 자금 원조로 북한 대사관 강제 철거.
 
 ▲ 1973년도
 。볼리비아 : 좌파 세력에 28만 달러 지원.
 。파라과이 : 좌파의 보스 로하스에게 18만 달러 지원.
 。우루과이 : 사회당 좌파에 34만 달러 지원.
 。아르헨티나 : 인민 해방군 등 2개의 좌익 단체에 70만 달러 지원.
 
 ▲ 1979년도
 。팔레스타인 : PLO게릴라에게 10만 달러 지원.
 
  AK자동소총에서 각종포·포탄도 지원
 
 ▲ 1969년도
 。차드 : 반란군 지도자 알바시·타쿠에 다량의 무기 제공.
 。이집트 : 대공포 100문 제공.
 
 ▲ 1970년도
 。파키스탄 : 소총, 탄약 3500만 달러 지원.
 
 ▲ 1971년도
 。파키스탄 : 중포 30문, 포탄 3500만 톤 지원.
 。에티오피아 : 엔토리아게리라(분리 독립파)에 무기 제공.
 。스리랑카 : 반정부 게릴라에게 무기 제공.
 
 ▲ 1973년도
 。캄보디아 : 크메르 루주군에 75mm포100문 지원.
 
 ▲ 1975년도
 。자이레 : 콩고 내란의 때, 어뢰정3 척, 소총 280정, 탄약, 고사포 지원. T72형 탱크 30대 제공.
 。나미비아 : 인민 단결 기구에 무기 지원.
 
 ▲ 1976년
 。시리아 : 미그 조종사 40명 파견.
 。북 예멘 : 대전차포 50문, 자동 소총 2000정 지원.
 
 ▲ 1977년도
 。가봉 : AK소총 60정, 경기관총 52정, 대공기관총 2500정, 박격포8문 제공.
 
 ▲ 1978년도
 。시리아 : 무반동 총포, 대공포 300문 지원.
 
 ▲ 1979년도
 。파키스탄 : 130mm포 20문, 포탄 15,000발 제공.
 
 ▲ 1980년도
 。이란 : 전차, 대전차 유도탄 제공.
 
 ▲ 1983년도
 。기아나 : 무기 및 탄약 6,000 톤 제공.
 。이란 : 이란-이라크전쟁 발발시, 8억 달러 상당 무기 지원. 이때 북한군의 곡산포와 장사정포탄의 위력이 파악됨
 
 ▲ 1984년∼87년도
 。팔레스타인 : AK자동 소총 3,200정, 탄약 20톤
 。이라크 : 고사 기관총 800 문, 방사 포200 문.
 。가나 : AK 자동 소총 1000정, 탄약 4톤
 
 ▲ 1988년∼92년
 。파키스탄 : 고사 기관포 450문, 포탄 30톤.
 。시리아 : 각종 폭탄 20톤.
 
 ▲ 2000년도
 。필리핀 : 대공 병기와 포탄 제공.
 
 ▲2005년도~현재
 。미얀마 북부 ‘네삐도’에 땅굴 굴착 기술 지원
 
 
 ▲ 요인(要人)암살
 
 -1968년 1월21일 ; 북한의 124군부대 소속 31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을 위해 청와대를 기습. 김신조 제외 전원사살.
 
 -1970년 6월6일 ; 북한 간첩 3명이 현충일 방문 중인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을 위해 현충문에 원격 조종폭탄을 설치. 폭탄이 사전 폭발해 한명이 죽고 나머지 2명은 사살됨.
 
 -1974년 8월15일 ; 서울 국립극장 기념사를 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조총련이 포섭한 문세광이 권총으로 암살 기도. 육영수 여사 피살됨.
 
 -1981년 7월 ; 친북(親北)캐나다 교포 최중화의 전두환 前대통령 암살계획이 사전 적발돼 캐나다 경찰에 체포됨.
 
 -1983년 10월9일 아웅산 묘소 폭파테러 ; 북한이 파견한 정찰여단 정규군 소속 3명의 테러리스트가 전두환 前대통령 등 정부요인 암살 기도. 각료 4명을 포함한 17명의 한국인이 피살됨.
 
 -1997년 2월15일 ; 김정일의 첫 동거녀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인 이한영氏가 북한이 파견한 2명의 테러리스트에 권총 암살됨.
 
 ▲항공기 테러
 
 -1958년 2월16일 ; 북한 간첩들이 부산에서 서울로 오던 KAL기의 전신(前身) KNA를 납북. 32명의 승객은 송환 기체는 미(未)송환.
 
 -1969년 12월11일 ; 북한 간첩들이 강릉에서 서울로 오던 KAL기 납북. 탑승자 51명 중 39명만을 송환하고, 나머지 12명과 기체는 미(未)송환.
 
 -1970년 4월3일 ; 일본 적군파 9명이 일본JAL보잉727여객기 납북, 김포공항 거쳐 평양으로 감. 북한은 적군파들을 영웅으로 환영하고 피난처 제공.
 
 -1971년 1월23일 ; 북한 간첩이 대한항공 소속 F-27 항공기 납북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침. 간첩이 사살되고, 조종사는 간첩이 떨어뜨린 폭탄을 몸으로 막고 순직
 
 -1987년 11월29일 ; 김정일의 직접 지시로 김승일, 김현희가 미얀마 근해 상공에서 KAL858기 공중폭파 테러. “88올핌픽 방해와 저지가 목적이었다”고 바레인에서 체포된 김현희가 고백.
 
 * 1988년 1월 미(美) 국무성, 1979년 수출관리법에 따라 “북한은 국제 테러 행위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지원을 제공한 국가”로 판정
 
 ▲납북
 
 1950년 6·25남침 이후 ‘소개(疏開)작전’ 이라는 명칭 아래 9만6013명을 납치. 남침 직후 석 달(7~9월)간 전체 납북자의 88.2%인 8만4659명이 납북되고, 20~30대 전문직·기술자 등을 중심으로 남성들만 집중적으로 납북(여성은 1.9%)되는 등 철저한 사전 기획 아래 진행. 1958년 이후에는 어로 활동 중인 어부 등 485명을 납치
 
 -1969년 12월11일 KAL 기장 유병하, 女승무원 성경희氏 등 12명 납북
 
 -1977년 7월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남한부부(윤정희·백건우 부부) 납치 미수
 
 -1978년 2월7일. 영화배우 최은희·영화감독 신상옥 부부 납북
 
 -1978년 4월13일 유학중인 고상문씨(氏) 납북
 
 -1978~1979년 한국 홍도, 선유도 여름 해안가에서 이민교, 최승민, 김영남, 이명우, 홍진표 등 고교생 5명 납북
 
 -1987년 7월20일 미국 유학생 이재환 씨(氏) 납북. 李씨는 정치범수용소에 있다가 2001년 2월16일 통일부에서 사망 통보를 받음.
 
 -1995년 7월24일 안승운 목사 납북
 
 -1999년 9월17일 중국 단동에서 사업하던 장세철 씨(氏) 납북
 
 -2000년 2월 중국 연길에서 선교활동 해온 한국국적의 미(美)영주권자 김동식 목사 납북
 
 *1978년 일본해안에서 다구치 아예코(이은혜. 김현희의 일본어 교사)를 납치하는 등 19명의 일본인 납북(일본 정부 공식 인정 10명 + 피랍자가족협의회 주장 9명)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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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3월12일 15시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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