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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후의 戰爭 '아마게돈'
전 세계로 퍼진 7만명의 나치(Nazi) 이야기

▲ 미국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의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작전을 감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페이퍼클립 작전’이었다. 이 가운데 폰 브라운(사진 오른쪽에서 일곱번째)이 데리고 온 로켓 기술자 132명은 단일 그룹으로 최대 규모였다. 사진은 당시 미국으로 이주한 나치 과학자들의 모습이다.

 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전인 1935~1940년 사이 독일의 나치(Nazi)는 엄청난 인력과 자금을 조달해 중국의 티베트와 남극 대륙을 탐사했다. 그리고 2차 대전이 종막에 다다를 즈음 나치는 상당수의 조직원들과 과학자들을 U-보트 잠수함을 이용, 아르헨티나를 경유해 남극대륙의 지하기지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이들 나치 잔당을 제거하기 위한 미국의 극비 군사 작전 계획이 바로 리처드 E. 버드(Richard E. Byrd) 제독이 주도한 ‘오퍼레이션 하이점프’(Operation Highjump, 1946년)다. 당시 버드 제독이 이끈 미 해군은 나치가 개발한 ‘원반형 비행기’(Flying Saucer)와 대결을 벌여 엄청난 고생을 했으나, 결국 작전은 실패로 끝난 채 미국으로 귀환해야 했다.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r2mMVX-ILvg&feature=related)
 
 맥아더 장군이 1955년 8월 17일 공개연설을 통해 “다음 전쟁은 ‘항성 간의 전쟁’(Interplanetary War)이 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 같은 이유다. [원문: “The nations of the world will have to unite for the next war will be an inter-planetary war, The nations of the Earth must someday make a common front against attack by people from other planets” (Statement printed in the New York Times by General Douglas MacArthur in 1955)]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gbA3C85XXXs)
 
 문제는 이 같은 미국의 나치 소탕 작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나치들이 전후 세계 각지로 퍼졌다. 나치 엘리트들을 해외로 도피시킨 대표적인 조직으로는 ‘오데사’(SS정예 요원들로 구성)와 ‘디 슈피네’ 등이 있다. 악명 높은 나치 당원이었던 클라우스 바비와 프리드리히 슈벤트의 경우 전후 CIC에 고용됐으며, 이를 통해 나치의 남아메리카 루트를 만들었다.
 
 바르비의 경우 볼리비아, 슈벤트는 페루, 월터 라우프는 칠레, 알폰스 사센은 에콰도르, 그리고 오토 스코르체니, 한스-울리히 루델, 하인리히 뮐러는 아르헨티나로 달아났다. 멩겔레는 파라과이로 도피했다. 스코르체니(나치 친위대 대령)의 경우 스페인 마드리드에 나치 인터내셔널 본부를 만들고 이들 남아메리카 네트워크를 통괄했다.
 
 그러나 이러한 나치의 자기 일신을 방어하기 위한 도피공작보다 더 심한 나치 영입 작전이 미국 내 친(親)나치 인사들에 의해 진행됐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나치의 최첨단 군사과학기술 획득을 명목으로 CIC(미 육군 첩보담당기관)등의 정보기관들이 나치 인사들의 미국행을 비밀리에 도왔다. 대표적인 작전이 바로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이다.
 
 소련에 앞서 독일의 최첨단 군사과학기술을 탈취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이 작전을 통해 1973년까지 과학자를 포함한 600여명의 나치 인사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들은 펜타곤과 정보부에 들어가 육군-CIA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심리학 실험에도 참가하고 MK-울트라(인간 심리 조종 프로그램) 등의 작전에 관여했으며, 타분(Tabun)과 사린가스(Sarin)가스와 같은 신경가스에 대한 연구를 미국으로 도입했다.
 
 미국의 우주개발계획에 참여한 대표적 과학자인 베너 폰 브라운(전 나치 친위대 소령)도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은사였던 발터 도른 베르거 장군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미국에 협력했다. 장군은 전범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됐지만 존 J. 맥로이(전 세계은행총재) 미 고등 판무관이 그를 무죄로 방면해 주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나치 전범 7만 명이 사면을 받았다. 1989년 사망한 맥로이는 나중에 록펠러(선조는 유태계 독일인)계의 체이스 맨해튼 은행장, 세븐 시스터즈의 벌률 고문, CFR(외교관계협의회) 의장이 되고, 케네디 암살을 조사하는 워렌 위원회에서 앨런 덜레스(전 CIA국장)와 함께 참여해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으로 사건을 종결한 인물이다.
 
 맥로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I.G 파벤의 법률고문으로 있으면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히틀러와 함께 특별석에 앉았으며, 이후 나치 독일과 각별한 이해관계를 갖게 됐다. 이와 함께‘페이퍼클립’ 작전에는 2차 세계 대전 기간 내내 친(親)나치 성향을 보였던 바티칸(Vatican)과 적십자가 관여하고 있었다. (인용: Hitler's Pope: The Secret History of Pius XII, John Cornwell)
 
 적십자의 경우 전후 나치를 위해 여권용 ID카드를 발급해주기도 했다. 이 같은 이유에선지 전후 적십자 국제위원회 회장이었던 앙드레 프랑수아 퐁세는 전 나치친위대 소속의 프랑스인이었다. 바티칸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시기부터 나치와 관계를 맺고 전후 나치 잔당들이 남아메리카로 망명하는 것을 도왔다. (인용 Unholy Trinity: How the Vatican's Nazi Networks Betrayed Western Intelligence to the Soviets, Key Phrases)
 
 미 역대 대통령 가운데 나치와 가장 관계가 깊었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아버지 부시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할아버지인 프레스콧 부시를 중심으로 한 부시 가문은 히틀러 치하 나치의 자금 해외유출과 나치로의 비밀송금을 도맡은 ‘돈세탁 협력자’였다.
 
 이와 함께 부시 가족 3대는 모두 ‘스컬 앤 본즈’(해골과 뼈, 나치 친위대 상징) 회원이라는 점이다.‘스컬 앤 본즈’는 1776년 5월1일 독일의 바바리아 지방에서 조직된 비밀단체의 조직원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만든 단체다. 2004년 대선 주자였던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민주당의 존 케리 등이 모두 겉만 다르고 속은 같은 ‘스컬 앤 본즈’ 단원들이었다.
 
 일본의 저술가이자 문화사가인 운노 히로시(海野弘)는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으로 해체됐지만 이들이 언젠가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로 부활해 정치-경제를 좌지유지하며 ‘세계 단일 정부’, ‘제4제국’ 건설을 주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
 
 1996년 AP통신은 나치 소유의 막대한 금이 뉴욕의 연방준비은행(FRB)이나 런던의 영국은행에 여전히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 바 있다. 나치 재산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21세기에도 이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쟁, 특히 세계적인 대전은 우연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전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6 25전쟁이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발발된 것이 아니라 북한의 치밀한 사전 준비였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글은 읽는 독자들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잘 알고 여러 역사적 사건들의 연결고리를 추리해 나가길 바란다.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관련기사]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의 비밀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군이 독일을 점령했을 때, 이들은 나치가 완성 직전에 있었던 전쟁 무기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뉴욕을 공격하기 위한 잠수함 발사용 로켓, 대공 미사일, 가변익 제트 항공기, 대륙간 탄도 미사일, 생화학 무기 등, 당시 독일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보다 수십 년은 더 앞선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이 조금만 더 많은 자금과 시간이 있었다면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기술들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의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작전을 감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 1945~1946)이었다. 페이퍼클립이라는 작전명은 미국으로 이송될 나치 과학자 및 정보기관 출신 인사들의 서류를 페이퍼클립으로 표시해놓은 데서 유래했다. 이 작전의 목표는 러시아보다 한 발 앞서 독일의 쓸모 있는 과학 기술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물론 인적 자원까지 포함됐다.
 
 총 642명의 나치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이주
 
 페이퍼클립 작전이 모집한 독일 과학자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폰 브라운 박사다. 폰 브라운은 미국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그는 미국으로 오기 전에는 독일의 V-2로켓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폰 브라운은 1937~1945년까지 독일의 악명 높은 피네문데의 로켓 연구센터의 기술 감독으로 일했다. 이곳에서 폰 브라운은 대공미상일과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개발했으며 A-4로켓(V-2 로켓의 원형)을 개발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NASA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페이퍼클립 작전이 진행되면서 ‘외국 기술자와 전문가’ 642명이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이 가운데 폰 브라운이 데리고 온 로켓 기술자 132명은 단일 그룹으로 최대 규모였다.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미국에 이송된 과학자의 상당수는 친(親)나치주의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더 루돌프(Arthur Louis Hugo Rudolph)로 그는 새턴 로팀의 또 다른 주축 멤버였다.
 
 그러나 그는 2차 대전 기간 내내 노예 노동으로 악명 높았던 수용소 내 공장 감독을 맡았던 인물로 당시 공장 일꾼으로 동원된 노예들은 굶주림과 고문에 시달렸고 지나친 노동으로 과로사하는 일이 허다했다. 미국은 초기 평가에서 루돌프를 ‘100퍼센트 나치주의자’라 평가되었고, 그를 억류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루돌프는 1984년 자신의 과거가 폭로되자 서독으로 망명해 1996년 1월 1일 함부르크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페이퍼클립 작전에는 나치의 악명 높은 생체 실험에 참여했던 과학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례로 쿠르트 블룸은 강제 수용소 죄수들을 대상으로 유행병 백신을 실험했으며, 몸이 아픈 죄수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블룸은 전후 미국으로 건너와 미 육군 화학전단에서 일했다.
 
 이와 함께 강제 수용소 죄수들을 대상으로 실행된 인체 실험을 감독하고 지휘했던 왈터 슈라이버 소장은 미 공군 의과대학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는 1952년 자신의 과거가 폭로되자 미국을 빠져나가 나치에 우호적인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독일의 핵폭탄?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과학기술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는 나치의 핵 개발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2005년 3월 14일 독일의 슈피겔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최초로 원자탄을 개발했고 초보적인 원자탄 실험을 세 차례나 했다고 주장한 역사학자 라니어 칼쉬(Rainer Karlsch)박사에 관해 보도했다.
 
 그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6명의 미래 노벨상 수상자들을 포함해 12만 5천명의 인원이 동원되고 프랑크푸르트시 넓이의 우라늄 농축 플랜트를 갖춘 보안구역에서 300억불 상당의 비용을 투입된 것에 비해 나치는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과 소수의 과학자들을 통해 원자탄을 개발했다”는 지론을 폈다.
 
 ‘히틀러의 폭탄’(Hitler`s Bombe)이라는 책을 저술한 칼쉬 박사는 과거 나치 과학자들과 군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1944년 독일 동북부 끝자락에 위치한 류겐섬에서 첫 원자탄 실험이 시행됐고, 1945년 3월 투링기아(독일 동부 소재)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실험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70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기술했다.
 
 칼쉬 박사는 또 투링기아 주민들을 상대로 2차 대전 당시 나치가 이 지역에서 소형의 원자탄 실험을 실시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투링기아 소재의 나치 친위대(SS)가 비밀리에 이 곳에 두개의 완벽하게 제조된 원자탄을 보관하고 있었고, 그 폭탄들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됐다는 주장을 펼쳤다.
 
 즉 2차 대전 당시 독일은 미국에 앞서 원폭을 개발해 놓은 상태였으나 다행히 전쟁이 연합군에 승리로 조기종결되어 미국이 유럽의 나치 원자탄을 일본에서 사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원자탄 개발계획인 '맨하탄 프로젝트'는 나치 보다 뒤늦게 원자탄을 완성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金泌材의 전체기사  
2011년 05월12일 17시19분  

전체 독자의견: 1 건
즉 2차 대전 당시 독일은 미국에 앞서 원폭을 개발해 놓은 상태였으나 다행히 전쟁이 연합군에 승리로 조기종결되어 미국이 유럽의 나치 원자탄을 일본에서 사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원자탄 개발계획인 '맨하탄 프로젝트'는 나치 보다 뒤늦게 원자탄을 완성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틀린 말입니다.
나치는 원폭 개발을 시작하지도 않았고 실패했습니다. 폰 브라운 등 4명의 나치 최고과학자를 심문한 결과 히틀러/괴링 등은 원폭에 관심이 없어 제작을 시작도 하지 못했다고 밝혀진 바 있습니다. (2014년 04월15일 16시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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