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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 나간 靑年들아 이 영화를 보라!
71명의 학도병 이야기 <포화속으로>

 ▲60년 전, 6·25 한국전쟁 당시 風前燈火(풍전등화)에 놓인 祖國(조국)을 지키기 위해 戰線(전선)으로 향하는 학도병들
 
 19일, 영화 <포화속으로>를 관람했다. 6월16일 개봉한 <포화속으로>는 포항여중(現포항여고)전투의 實話(실화)를 다룬 영화다.
 
 
 [포항여중전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
 
 포항여중전투는 1950년 8월11일, 學徒兵(학도병)들이 인민군 5사단 및 766유격대와 8시간이 넘는 혈투를 벌여 인민군의 포항 진출을 11시간동안이나 지연시킨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서 학도병 71명 중 47명이 戰死(전사)했다. 학도병들의 희생은 포항시민 20여 만 명과 육군 3사단 및 기타 지원부대 병력의 안전지대 철수를 돕고, 국군의 반격에 크게 기여했다.
 
 <포화속으로>는 6·25전쟁이 북한의 南侵(남침)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밝히고, 전쟁의 급박함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이후 낙동강 방어선 구축을 위해 후퇴하는 국군 3사단의 자리를 71명의 학도병이 대신하는 내용이 전개된다.
 
 <포화속으로>는 학도병이 學生(학생)과 軍人(군인)이라는 경계에서 군인이 돼가는 과정을 실감나게 그렸다. 훈련 한 번 받지 못해 총도 제대로 쏘지 못하고, 규율도 엉망인 학도병들은 決戰(결전)의 시간이 다가 오자 "학도병은 군인이다"고 외치며 '군인'으로 하나가 된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학도병들을 '하나된 군인'으로 만든 것은 祖國(조국)을 짓밟고, 戰友(전우)의 生命을 빼앗아간 '敵에 대한 분노'였다.
 
 학도병으로 함께 참전한 중학생 동생이 인민군의 총에 맞아 고통 속에 죽어가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형은 자신의 총으로 동생을 쏜다. 형은 이를 악물고 다시 인민군과 싸울 준비를 한다. 학도병을 향해 前進(전진)해 오는 인민군 탱크를 M1소총으로는 아무리 쏴도 소용이 없었다. 이 탱크를 막기 위해 학도병은 수류탄을 들고 敵의 탱크로 돌격해 自爆(자폭)한다. 가난 때문에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학도병은 비록 학교는 다니지 못했지만 자신도 학도병이라며 자랑스러워하며 싸운다.
 
 영화 末尾(말미)에 포항여중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가는 국군이 등장한다. 지원군으로 등장한 國軍을 봤을 땐 "믿을 건 국군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끝난 후 자막이 올라갈 때 쯤 포항여중전투에서 생존한 老兵(노병)의 증언이 이어졌다. 이 증언을 듣고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영화가 끝났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선 안 된다. 이들의 증언을 다 들어야 <포화속으로>를 제대로 본 것이다.
 
 <포화속으로>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젊은이들이 꼭 봐야 할 영화다. 영화를 볼 때 "저 학도병이 만약에 나였다면"이라는 感情移入(감정이입)을 한다면 영화에 더 깊게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만들어진 영화 중, '6·25의 책임이 북한에 있다'고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는 없었다. 10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국군과 인민군을 둘 다 惡(악)으로 그려냈다. 근래에는 국군과 인민군이 서로 협력하는 내용의 영화(<천군>, <웰컴투동막골> 등)도 있었다. 하지만 <포화속으로>는 彼我(피아)구분을 명확히 했다.
 
 일부에선 "150억짜리 反共(반공)영화"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 <포화속으로>를 '반공영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들에겐 '國軍'을 善으로, '北韓'을 惡으로 그리는 영화는 모두 반공영화일 것이다.
 
 포항여중전투의 학도병뿐만 아니라 수많은 학도병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펜을 버리고 戰線으로 달려갔다는 사실 또한 잊어선 안 된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아직도 遺骸(유해)를 찾지 못해 조국산천에 묻혀있다.
 
 
 아래는 1950년 8월, 포항여중전투에 참전한 故이우근 학도병의 일기다. 이우근 학도병은 서울 동성중 3학년 재학 중 소년병으로 참전했다. 1950년 8월11일, 그는 포항여자중학교 앞 벌판에서 전사했다. 이 일기는 그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됐다. 이 글은 어느 여군 정훈장교가 기록했는데, 수첩의 핏자국으로 인해 글씨를 알아 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1950년 8월 10일 쾌청
 어머니, 전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두고 10명은 될 겁니다.
 나는 네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 놓았습니다.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 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 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이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론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 주시던 백옥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 입으며
 왜 수의(壽衣)를 생각해 냈는지 모릅니다.
 죽은자에게 갈아 입히는 壽衣말입니다.
 
 어머니,
 제가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날 것 같진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니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 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전 꼭 살아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거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테니까요...

 
 -1950년 8월11일 포항여중전투 당시 전사한 학도병 이우근의 수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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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6월21일 14시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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