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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과 80년대 학생운동

[아래의 글은 북한민주화포럼 이동호 사무총장이 2006년 자유지식인선언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원고이다. 386주사파 운동권 출신인 그는 당시 집권386의 실체에 대해 아래와 같이 보고했다. 시간이 지났지만, 참고해볼만 가치가 있는 좋은 자료이다]

 

1. 들어가는 말

 

지난 한 해는 정권을 잡은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부에 의해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관련된 끊임없는 문제제기가 있었던 최초의 해로 기억될 것 같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제기는 대학가나 소수의 재야 및 시민단체 수준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작년의 경우는 집권세력에 의해 공개적이고 전면적이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그 파장과 파급력에 있어서 질을 달리하고 있다.

 

이는 우리사회의 권력 주도권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사회의 주류가 기존의 산업화를 주도했던 세력에서,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까지 좌파적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으로 전면적 교체가 이루어 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양대 권력을 좌파 사회운동세력이 한 손에 쥐게 된 것은 해방 이후 처음이다. 17대 총선 이후 이들은 정치의 전면에서 우리 사회를 주도 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 우리 국민들 사이에는 남북 분단의 원인을 미국이 제공했다는 터무니없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고, 오늘날 남북한 간의 갈등의 배경에는 미국의 강경정책 탓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렇게 만연된 반미감정은 우리의 국력이 성장한 만큼 우리의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인식하기에는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

 

반면에 북한 김정일 정권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론은 어느새 우리나라의 주도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북한의 핵에 대하여 이유 있다는 발언을 하여도 어느 누구하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미국에 대하여 그 면전에서 용기 있는 발언을 하는 줏대 있는 지도자쯤으로 인식되기까지 한다.

 

가장 문제가 심각한 것은 이러한 사실의 주장과 전파가 재야나 시민단체가 아니라 정국운용의 책임을 지고 있는 집권당과 대통령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제기된 시민혁명은 계속되어 져야 한다는 발언이나, 주류세력 교체론, 박물관에 들어가 있어야 할 국가보안법 등의 발언, 이른바 4대법안을 둘러싼 우리사회의 대립과 갈등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사회에 대한 관점과 태도가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심지어는 대변하기 까지 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다. 대한민국의 해방이후의 역사가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가 아니라, 오욕과 굴절로 얼룩진 수치의 역사라는 좌파들의 주장에 이르러 서는 우리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관점과 태도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들의 이러한 인식은 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된 좌파적 사회운동의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고, 20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서도 그 근본이 바뀌지 않은 채 곳곳에서 집단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이들에 대하여 권위주의적 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이며, 사회가 선진화를 위해 치르는 댓가 정도로 생각하여 관대하게 바라보았다.

 

좌파적 사회운동에 대한 주류사회와 지식인사회의 안이하고 무사안일적인 다수 국민들은 좌파적 사회운동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며, 문제의 심각성을 잘 깨닫고 있지 못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리사회의 분열대응으로 이들은 우리 국민들의 인식의 혼란을 효과적으로 이루어 냈다. 대과 갈등에는 아직도 80년대식 좌파적 사고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이제 우리사회의 주류가 된 세력의 편향된 인식에 그 원인이 있다. 이글은 그 편향된 인식의 현장으로 시계를 되돌려 살펴봄으로서 올바른 대처방안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이글은 한때 잘못된 사상과 인식 위에서 자랑스러운 우리역사를 흠집 내고자 했고, 잘못된 길로 가자고 주장했던 저에 대한 고백입니다. 과거의 학생운동의 경력이 더 이상 자랑스러운 훈장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리사회에 대한 부끄러운 기록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저의 이러한 생각이 그 당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운동에 동참했던 분들에 대한 흠집 내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고자 했던 좌익운동권에 대한 저의 반성적 접근으로 헤아려 주십사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2. 전대협의 탄생과정

 

1) 전사

 

80년대 학생운동은 그 이전의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과는 내용면에서 확실히 구분된다. 70년대 학생운동은 인권과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소박한 차원의 학생운동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서 학생운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중반에 이르러서는 주체사상과 혁명론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 이전에도 소수의 서클 차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80년대처럼 공개적이고 대중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현재 우리사회의 주도적 그룹인 전대협의 탄생을 이해하기위해서는 이전에 진행되어온 학생운동 내부의 논쟁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80년대 중반에서부터 이루어진 세칭 NL계열의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깃발-반깃발 논쟁>

 

전두환 정부는 83년 말, 이전의 시위로 구속되었던 학생들을 석방하고, 반정부인사들에 대한 사면과 복권을 단행했다. 곧이어 84년 2월에는 정치활동 피 규제자에 대한 2차 해금과 학원에서 상주하던 경찰병력을 철수하고, 학생회의 부활을 허용하는 이른바 학원자율화 조치를 단행했다.

 

84년 상반기부터 소위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이 정부당국에 의해 발표되는 85년 상반기까지 수도권의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는 이러한 정부당국의 조치에 대한 학생운동의 방향성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지속되는데 이를 지칭하여 깃발-반깃발논쟁 혹은 MT-MC논쟁이라고 불렀다.

 

이런 명칭은 83년 12월 학원자율화조치 이후 석방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온 복학생들을 중심으로 '깃발'이라는 팜플렛을 통하여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그룹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면서부터 연유한다. 이 논쟁은 85년 상반기 정치투쟁조직의 건설문제를 놓고 이론적 대립을 계속하면서 MT-MC논쟁으로 이어갔다. MT란 민주화투쟁위원회의 머리글자를 지칭하며, MC란 Main Current 즉 주도세력이라는 뜻이다.

 

학원자율화조치 초기인 84년 초 당시 학생운동의 주도그룹은 곧바로 반정부 투쟁으로 나설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전두환 정부의 조치의 허용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먼저 학내에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학원자율화투쟁을 이끌고, 이러한 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단계적으로 전두환 정부에 대한 정치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이전의 단계적 투쟁론인 이른바 무림의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반면 깃발 혹은 MT그룹은 학생운동의 선도적 투쟁과 이를 통해 광주투쟁에서 보여 지듯이 전민중적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학림의 입장을 계승하여 사상과 이념을 보다 분명히 하는 투쟁위원회가 학생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시기 NDR이념을 수용한 이 그룹은 지하의 「중앙투쟁위원회」산하에 半공개 투쟁조직인 「삼민투(민중민주화와 민족자주통일을 위한 투쟁위원회)」의 건설을 시도했다.

 

이에 대하여 MC그룹은 절충안을 내놓아 85년 5월 7일 서울대에서 양 진영 연합으로「삼민투」가 결성되었다. 곧 이어 연대, 고대, 성대, 서강대 등에서도 결성이 이루어졌다. 이후 「삼민투」는 5월 23일 서울대, 연대, 고려대, 성균관대,서강대 등 5개대 73명의 학생이 미문화원점거농성을 감행했다. 85년 여름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으로 MT그룹 지도부가 대거 검거된후 MT그룹의 잔여세력과 MC그룹이 통합을 추진하여 소위'깃발-반깃발'논쟁은 일단락되었다.

 

<C-N-P 논쟁>

 

84년 겨울에서 85년 봄에 걸친 기간에 재야운동과 학생운동 내에서는 정부의 자율화조치에 대한 정세인식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에 입각한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 모순구조와 혁명의 대상, 혁명주요동력의 설정과 역량편성 등을 놓고 소위 C-N-P논쟁을 벌이게 된다.

 

C-N-P는 CDR(Civil Democratic Revolution: 시민민주혁명론), 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민족민주혁명론), PDR(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중민주혁명론)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용어이다.

 

C-N-P논쟁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 공개기구 운동가들 사이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논쟁은 처음부터 완전한 이념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었으며 논의가 확산되면서 점차 CDR, NDR, PDR 등의 용어로 집약되어갔다.

이상의 세 가지 입장을 좀더 도식화하면서 CDR, NDR, PDR개념으로 공식적인 논의가 진행된 것은 84년 4월경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운동론 세미나」과정이었다. 이 세미나에서 당시 민청련 정책실장이던 이을호는 주제발표를 통해 세가지 운동론을 소개하고 있다.

 

CDR론은 당시 종속이론을 근거로 한국사회를 주변부자본주의로 보았다. 한국자본주의는 종속성과 파행성이 관철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모순을 느끼는 계층은 노동자등 기층민중 만이 아니라, 영세자영업자, 민족자본가 등 다양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세와 군사독재권력과 다양한 계층간의 대결이 현단계 운동의 성격이다. 민주적 민간정부를 수립하고, 그 과정에서 기층민중운동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PDR론은 한국의 사회구성체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파악하고 있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초기의 파행적 성경에도 불구하고 70년대 산업자본의 확립을 거치면서 자본주의적 발전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한국혁명운동의 주력은 노동자, 농민 등 기본대중과 혁명적 지식인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은 독점자본을 물적 토대로 하는 제국주의 및 군부파쇼세력과 보수야당을 한편으로 하고, 기층민중과 혁명적 지식인을 한편으로 하는 양자간에 형성된 모순으로 보고 있다. 이 입장에서는 당면과제를 독점자본 및 그 유지세력인 군사독재권력의 타도에 두고 그후 기층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중권력을 수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NDR론은 한국사회구성체를 신식민주의적 독점자본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입장에서는 한국의 자본주의는 스스로 발전을 하기도전에 세계자본주의체제에 깊숙이 편입됨으로써 신식민주의적 종속성이 심화되었으며, 그 상태에서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발전하였고 국가권력의 비호아래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이루어져 독점자본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주요모순은 민족적 모순과 국가파쇼적 모순이 중첩되었다고 본다. 여기서 기층운동의 강화되는 조건에서 중간계층과 연대하여 민주적이고 민족적인 범 세력연합권력을 창출한 다음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현단계 한국변혁이론으로 NDR론이 주류를 이루면서 CDR론은 우익기회주의이론으로, PDR론은 좌익급진주의이론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우세하였다.

 

한편 서울대학생운동의 배후 인물로 민주화추진위원회를 주도했던 문용식은 자신의 최후진술에서 NDR론이 자신들의 지도이념이며, 한국혁명운동의 민족적 성격을 표현한 개념으로 운동의 주체적인 면에서 PDR이라고 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다만 NDR론에서 민중은 기층민중 뿐 아니라 청년학생, 진보적 지식인, 중간층 일부까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층민중 만을 지칭하는 PDR의 민중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 진행된 학생운동의 논의과정은 한국의 학생운동이 사회주의사상과 이론이 수입과 모색기를 거쳐 본격적으로 한국사회혁명운동의 이론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좌파 학계에서 진행되던 사회구성체 논쟁과 맞물리면서 초기의 초보적인 수준에서 벗어나 한층 발전된 형태로 진행되었다.

 

<주체사상의 도입과 「자민투」-「민민투」에서 건대사태까지>

 

85년 말부터 88년까지 진행된 이 시기의 학생운동은 이전까지 학생운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는 운동의 지도사상으로 북한의 주체사상을 수용하고, 그 혁명노선을 학생운동에 적용한 것이다. 85년까지 학생운동은 자생적 사회주의혁명론자들 이었으나, 이 시기 학생운동은 주사파가 장악하여 학생운동의 대세를 형성한 것이다.

 

주체사상의 학생운동내의 수용과정은 83년에 학원가에 유포되었던 『예속과 함성』이 그 시작이었다. 85년 9월 당국에 의해 구미간첩단 사건의 주범으로 밝혀진 김성만, 양동화 등이 북한의 혁명론을 남한의 학생운동에 소개한 것이다. 이들은 책자에서 한국은 1945년 이래로 미국의 식민지 이며, 한국의 군부독재정권은 미국에 의해 양성되고 조종되는 괴뢰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자는 당시 학생운동에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주장은 학생운동 내에서 본격적으로 수용되지는 않았다.

 

주체사상의 본격적인 수용은 「강철서신」으로 알려진 김영환의 「단재사상연구회」로 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 김영환은 단파 라디오로 북한의 「구국의 소리」방송을 집중적으로 청취하는 한편 여기서 제기되는 남한혁명론을 토대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이는 60년대의 통혁당, 70년대의 남민전 이후 최초의 조직적 형태를 띤 반 제국주의세력의 등장이며, 학생운동을 모태로 출발하는 것으로는 최초였다.

 

김영환그룹은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NDR론과 치열한 사상투쟁을 전개하여 그 세력과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은 『반제민중 민주화 운동의 횃불을 들고 민족해방의 기수로 부활하자』(일명: 해방서시)라는 소책자를 학생운동에 광범위하게 전파하였다.

 

이 소책자에서 그들은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의 한반도 근대사 100년은 제국주의의 침략의 역사요, 제국주의에 대한 민중의 투쟁의 역사다. 한국사회는 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가 파쇼적으로 지배하는 식민지사회다 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그간의 학생운동이 미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과 민중의 민족해방에 대한 열망을 제대로 주시하지 못한 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이는 학생운동 내부에 커다란 충격과 파급을 가져왔다.

 

이제 까지 학생운동은 주요한 운동의 대상 즉 주적이 독재정권과 그들의 물적 토대인 독점자본이라고 보았으나, 이들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적은 미국 다시 말해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 반미운동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고, 2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386 핵심운동권의 우리사회에 대한 인식의 주요한 기조를 이루고 있다.

 

주사NL파는 치열한 사상투쟁으로 학생운동의 대세를 장악하는 한편 서울대를 필두로 지하 지도부를 건설하였다. 86년 3월 29일 서울대에서 비합법 지도부인 「구국학생연맹」(이하 구학련)을 결성하고, 그 산하에 半합법투쟁기구인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일명: 자민투)를 86년 4월에 발족시켰다. 그 산하에 「반전반핵투쟁위원회」 등 5개 투쟁위원회를 두었다. 구학련의 투쟁기구인 자민투는 86년 4월 반전반핵투위르 중심으로 반전반핵투쟁과 전방 군부대 입소 반대투쟁을 감행하면서 김세진, 이재호 등이 분신을 감행하였다.

 

자민투의 선도적인 구호와 투쟁은 당시 학생운동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이를 토대로 자민투는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급속히 장악했다. 또 기관지로 『해방선언』을 발행해 전체 학생운동에 그들의 혁명론을 파급시켜 나갔다.

 

85년 하반기 NDR론 하에 「삼민혁명론」으로 통일되었던 학생운동은, 86년 초 NLPDR론으로 무장한 자민투가 반제국주의직접투쟁과 반전반핵투쟁을 선언하자, 기왕의 MT계열은 NDR론을 기본골간으로 계승하면서 반제반파쇼투쟁을 선언하는 「반제 반파쇼 민족민주 투쟁위원회」(일명: 민민투)를 조직하고 기관지로서 「민족민주선언」을 발행하였다. 이로써 학생운동은 86년 상반기 이후 「자민투」와「민민투」로 양분되었으며, 각자의 기관지를 통해 본격적인 논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86년 상반기 투쟁을 통하여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주사NL진영은 서울대 「구학련」을 필두로 연세대의 「구국학생동맹」,고려대의「애국학생회」등을 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86년 10월 28일 건국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의 결성식을 감행한다.

 

그러나 건국대투쟁으로 주사NL진영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당시 내걸었던 구호가 국민정서와 매우 동 떨어진 것이었다. 북한방송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구호가 집회장소에서 등장했던 것이다. 이들의 모험적인 구호와 투쟁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데 실패했고, 대규모 검거선풍으로 당시의 지도부가 대부분 구속되고 수배를 받았다. 건대 사태로 구속된 학생만 1290명에 이르고, 각 대학의 학생운동은 3-4학년 실질주도 그룹이 대거 구속 됨 으로써 심각한 차질을 낳았던 것이다.

 

건대투쟁에 대한 주사파 내부의 평가를 보자.

 

건대 항쟁은 주객관적인 정세와 유리되고, 대중의 준비 정도에 걸맞지 않은 반공이데올르기분쇄투쟁, 조국통일촉진투쟁 등을 제기함으로써, 정권에게 엄청난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고, 사상 유래 없는 대 탄압을 촉발시킨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정권의 탄압으로부터 조직을 보위하고 대중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탄압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구학련, 애국학생회, 구학동 등의 혁명적대중조직들도, 구성원이 건대항쟁 이후 대부분 검거됨으로써 와해지경에 이른다.

 

주사NL진영은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건대사태를 통해서 두 가지의 결론에 이른다.

 

첫째, 투쟁노선에서 좌편향의 문제다. 86년 초 반전반핵투쟁으로 시작하여 서울대에서의 「민주조선」대자보게재사건, 애학투 발족식에서의 반공이데올르기 분쇄투쟁선언에 이르기 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지속된 투쟁노선상의 심각한 좌편향은 건대투쟁을 계기로 더욱 극대화되어 대중과의 심각한 괴리를 초래했다. 아무리 반미투쟁이 절박하다고 할지라도 주객관적인 정세와 대중의 준비 정도에 걸맞게 투쟁을 조직 전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정에 의거하지 못한 전략적인 구호의 남발은 대중을 투쟁으로 고무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둘째, 조직노선상의 좌편향의 문제이다. 지도조직은 대중조직 속에서 단련되고 대중조직의 보호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급히 지도조직을 건설하고 그 산하에 투쟁위원회를 건설 함으로써, 선진적 활동가를 끊임없이 투쟁으로 내몰아 조직의 붕괴를 자초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선은 그동안 문제로 제기 되었던 선도투쟁론의 재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NL진영은 이러한 편향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사상관점과 혁명이론이 이를 계기로 제기되고 확산되었다는데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올바른 사상관점과 혁명론이란 북한의 주체사상과 혁명론을 지칭하고 있다.

 

2) 북한의 혁명적 대중노선에 따른 전투적총학생회론과 전대협 건설

 

86년 건대투쟁과 구학련 등 지도조직의 붕괴는 학생운동으로 하여금 '대중과 함께'라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북한의 '혁명적군중노선'에 비추어 볼 때 86년 투쟁은 대중을 투쟁의 주체로 세우지 못한 분명한 오류였다는 것이다. 학생운동은 대중노선의 불철저함에 심각한 자기반성을 한다.

 

공산주의자의 혁명전략의 핵심은 수많은 대중을 어떻게 혁명의 대오로 이끌어 내느냐 하는 데 항상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대중을 혁명의 대오로 이끌어 내기위해서는 사실의 왜곡과 과장하기 등 숱한 방법이 동원된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중들에게 생소한 단어의 사용은 금물이며 대중이 이해할만한 어휘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 대한 폭로는 분명히 옳은 것이기는 하나 방법이 세련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국을 제국주의자이며 침략의 원흉이라는 구호는 사회혁명의 전략적 구호인 만큼 무모하게 남발될 것이 아니라 미제국주의의 앞잡이인 군부독재정권 즉 전두환 정부에 대한 폭로를 통해 독재를 지원하는 미제국주의 등으로 폭로하고 투쟁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노선이 관철될 때 대중은 독재에 대한 투쟁에 나서고 이 투쟁을 미제에 대한 혁명투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노선의 제기는 조직노선상에는 대중조직의 강화로, 투쟁노선에는 선도적투쟁을 지양하고 대중투쟁을 창출하는 문제로 집약되었다. 이시기 지도부의 철저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역량손실이 덜한 학교가 고려대와 연세대였다. 86년 말부터 이들 학교를 중심으로 대중노선을 실천하기 위한 내부 사상투쟁이 시작된다.

 

구학련지도부가 86년 초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민민투에 대항하여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에 각 대학간의 비밀연대사업부서가 있었고, 이를 통하여 86년 애학투가 건설될 수 있었다. 각 대학간의 연대사업부서는 86년 각 대학 지도부의 철저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건재했다. 87년 대중노선은 이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고려대 조혁을 중심으로 각 대학의 잔존세력을 모아 「반미청년회」를 결성했다. 「반미청년회」는 87년 학생운동을 사실상 배후에서 주도하게 되었다.

 

대중노선의 구현문제는 먼저 조직노선상의 학생회 강화로부터 출발 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그 동안 학생회를 학생들의 자주적 조직으로 그 지위와 역할을 보지 못하고, 비합법 지도조직 혹은 투쟁기구의 외피로만 인식되어 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생대중을 결집시키고 이들을 투쟁의 중심으로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진적 인자들만의 선도적 투쟁으로 학생대중과 점점 유리되었다는 것이다. 학생회가 유력한 대중활동공간으로 재평가되면서 활동가들이 학생회로 집결하게 되었다.

 

학생회 강화라는 조직노선이 가장 먼저 진행된 곳은 고려대였다. 고려대에서는 87년 초 기존의 지하 지도부인 「애국학생회」를 해체하고 '총학생회활성화추진위'(이하 활추위)를 결성하여, 기곳에서 활동하던 활동가들을 학생회로 활동공간 이전을 준비하였다. '활추위'는 총학생회와 각 단과대, 과학생회에서 활동할 간부를 발굴 육성하여 각급 단위의 학생회로 전진 배치하였다. 이상의 과정을 통하여 학생회가 학생운동 활동가의 수중으로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학생회를 선거를 통해 완전히 장악한 이후에는 '활추위'가 비밀학생회, 학생회의 비서체계 등으로 자기변화를 거듭하면서 존속하다가, 체계의 학생회와의 중복성, 비효율성의 문제가 제기되어 87년 하반기에는 완전히 해체되고, 대중조직인 학생회와 소수의 전위조직인 「반미청년회」만 남게 되었다.

 

고려대 이외의 나머지 대학들도 비슷한 경로를 거치면서 총학생회 강화사업을 진행 시켜나갔다. 학생회선거가 마무리되는 87년 봄에는 거의 모든 대학에서 학생회가 기존의 투쟁위원회의 하부체계가 아니라 하부 조직원을 지닌 명실상부한 조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87년의 투쟁은 이러한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진행되게 되었다.

 

각 대학 총학생회가 활동가에 의해 장악된 조건에서 대학간 연합조직도 새롭게 구축되었다. 애학투 같은 투쟁위원회의 연합체가 아니라 각 대학 총학생회의 대표자간의 협의체적인 조직이 시 시기의 주요한 대학간의 연대조직으로 등장한다. 87년 5월 6일 연세대에서 결성된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서대협)가 그것이다. 총학생회강화노선의 총화로 탄생된 서대협은 87년 6월 항쟁 당시 수많은 학생대중을 투쟁으로 나서게 하면서 학생들의 실질적인 연대조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총학생회의 전투화, 서대협의 건설로 나타난 87년 상반기 학생운동 조직노선의 전환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학생운동 내부의 활동가들을 끊임없이 선도투쟁의 장으로 내몰았던 기존의 조직노선을 극복하고 활동가들의 제일 임무를 대중조직 속에서의 대중들과의 대중사업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시기 각급 학생회 단위에서 이들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학생대중들의 참여를 유발 시키는 문화사업, 교육사업, 정치토론 들이 대중적으로 행해졌고 학생운동은 급속히 학생들 속으로 침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업의 위력은 87년 6월 항쟁에서 확인된다. 기존의 학생운동의 정치집회가 많아야 수백 명의 단위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6월항쟁의 과정에서 각대학에서 집회에 참석하는 학생의 수가 수천명을 넘어서는 가히 폭발적인 증가를 보였던 것이다. 각 학생회에 소속되어있는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전체 학생이 참석하는 토론회를 개최하고 이 결과로 학생회 단위로 총학생회가 마련한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소수가 비밀리 집회를 계획하던 방식에서 학생회 중심으로 집회를 계획하고,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은, 그간 학생운동을 거리를 두고 보았던 학생대중의 참석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하였다.

 

총학생회강화론은 이후 '전투적총학생회론'으로 정식화 되어 87년 학생운동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87년 5월 서대협의 출범과 6월항쟁의 결과 전국 대학으로 확산되어 87년 8월 19일 충남대에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를 발족하여 해방후 최대의 학생조직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전투적총학생회론은 대중조직의 가장 중요한 형태로 조합(학생회)이라는 인식하에 대중활동의 총력을 조합으로 집중하자는 것이다. 그 근거는 학생회야 말로 가장 광범위하게 대중을 인입 할 수 있는 조직이라는 것, 대중의식화조직화의 가장 유용한 공간을 제공해준다는 것, 대중의 정치적 지향과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힘, 즉 대중의 정치역량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투적총학생회론에서도 조합을 그 자체로 전투적이라고 사고 하고 잇지는 않다. 조합 그 자체는 전투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다고 보았다. 이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즉 전투적총학생회론은 총학생회를 전투화 하자는 것인데 이 전투화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하고 현실의 총학생회를 민족해방운동의 주요역량으로 키워가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전투화는 지도핵심의 지도가 존재함을 의미하며 학생조합이 민족해방을 자신의 궁극적 목표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학생조합이 학생대중의 자주성을 철저히 옹호하고 실현하려는 입장에 서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이 말하는 지도핵심의 지도를 전제한다는 말의 뜻은 북한의 「한국민족민주전선」(이하 한민전)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도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 학생운동에서는 북한의 「구국의 소리」방송을 청취하고 이를 전파하기 위한 선전팀이 존재 했다는 사실은 당국의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이들은 한민전에서 제시하는 투쟁구호 및 투쟁전술을 그대로 받아 이를 학생운동 내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한민전은 남한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민전의 방침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이를 학생운동 내에 관철 시키는 조직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학생운동 내의 조직이 「반미청년회」 였다.

 

87년 당시 학생운동 내에서 한민전의 방침을 학생운동 내에 전파하고 실현하기 위한 조직으로 「반미청년회」,「조국통일그룹」, 서울대를 주축으로 구성된「관악자주파」 등이 있었고 이들 그룹이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지도 하였다. 이들은 모두 주체사상과 북한의 전략전술론으로 무장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해당시기 투쟁전술에서 차이를 보였고,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일면 대립 일면 협력 하면서 90년대 초 까지 학생운동을 주도 하였다.

 

주사파 NL에 의해서 주도된 학생운동은 87년 들어 조직노선에서 대중노선의 구현과 함께 투쟁노선에서도 일대 전환을 모색했다. 86년의 투쟁이 대중의 수준과 준비 정도, 정서 등을 고려하지 않은 모험주의 적 투쟁이었다는 비판과 함께 대중과 함께 투쟁하는 방식에 대한 고려와 시도가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87년 봄에는 각 대학마다 학생운동의 대중성 확보를 위한 학원민주화 투쟁이 주류를 이루었다.

 

87년 봄 애학투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학생들에 대한 학사징계 반대 투쟁이 서울대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부산대, 경북대, 경상대, 울산대, 동의대, 전남대, 전북대 등에서 학원민주화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 투쟁에 학생들의 반수 이상이 투쟁에 동참하는 위력을 과시 했다. 이러한 투쟁을 발판으로 학생운동은419계승투쟁과 518계승투쟁을 이전과는 그 규모 면에서 다른 대중적 투쟁으로 만들어 갔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매개도 없이 반미투쟁을 진행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당시 초미의 관심사로 되고 있던 개헌문제를 매개로 반독재민주화투쟁과 반미자주화투쟁을 결합하여 벌여 나갔다, 이렇게 학생운동의 투쟁노선을 재정립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박종철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 413호헌조치 등의 사건이 터진다. 대중의 분노를 자아냈던 일련의 사건이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6월항쟁의 원동력으로 학생운동의 조직과 투쟁노선의 변화와 실현이라는 측면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4. 13호헌조치 후 학생운동은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라는 대중적 슬로건을 채택하고 광범위한 학생을 투쟁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학생들의 대중적인 투쟁은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3.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론)의 내용

 

NL의 혁명론은 북한의 혁명론을 그대로 직수입한 것이다. 그 증거는 NLPDR의 주요논거인 사회에 대한 이론과 식민지半자본주의론, 혁명의 본질과 임무, 대상과 동력 등에서 그대로 일치한다.

 

당시 NL진영은 교조주의,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주체적 관점에서 혁명론을 수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자신들의 주체사상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상이며, 마르크스주의 완성이라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들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의 직접적인 수용과 적용은 사대주의이자 교조적 태도라는 것이다.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혁명론인 민족해방인민민주의의혁명론은 코민테른 강령에서 제시된 후진국형 공산혁명전략을 원용한 것이다. 이 전략은 먼저 노동자계급,농민, 청년학생, 진보적지식인을 주력군으로 하고 반동관료 및 매판자본가를 제외한 각계각층을 보조역량으로 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먼저 미제를 축출하고 파쇼정권을 타도한 다음 용공정권인 민족자주정권을 세우고, 이어 북한과의 연방제통일을 한 다음 사적 소유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 수립을 내용으로 하는 본격적인 사회주의혁명을 진행하는 전략이다. 이 혁명에 있어서 노동자전위당의 지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1단계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주사파가 제기하는 남북한간의 통일은 남쪽에 용공정권의 수립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북한은 「구국의 소리방송」「평양방송」등 대남방송을 통하여 남조선혁명론에 대한 체계적인 운동강좌를 시리즈로 내보내었는데 이를 NL진영이 방송을 녹취하여 수용한 것이다.

 

1) 한국 사회평가

 

공산주의혁명론에 따르면 해당시기 해당사회가 어떠한 사회의 성격을 가지느냐에 대한 평가로부터 혁명의 성격과 기본임무, 대상과 동력을 구분한다.

NL진영은 북한의 주체사관에 입각해서 한국 사회를 평가한다. 사회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생산수단의 소유관계 만이 아니라 정권의 소유관계를 같이 파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기존의 사회주의 이론에서 말하는 사회구성체론과는 다른 것으로 북한은 이를 사회성격론으로 불렀다.

 

주체사관의 사회성격론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식민지半자본주의사회’라는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가 정치체제 면에서 미국의 군사적 강점 하에 있는 식민지사회이고 당시의 정권은 미국의 대리통치정권인 허수아비정권이기 때문이며, 경제체제 면에서는 정상적인 경로에 의해 형성된 자본주의가 아니라 봉건적 요소와 전근대성 및 매판성 등이 중첩된 반자본주의사회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 유의할 점은 NL진영은 초기에 한국사회를 ‘식민지半봉건사회’로 평가하다가,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로 수정하여 성격지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주사파의 반봉건규정이 PD진영과의 사상투쟁에서 밀리는 데서 비롯된 대응이며, 직접적으로는 한국민족민주전선(이하 한민전)의 구국의 소리방송에서 88년 2월 17일 한국혁명전략 지침인 "변혁운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라는 논설을 통해 한국사회를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라고 수정보도한 데 기인한다. 이후 NL진영은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폐기하고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주장했다.

 

실제 북한은 60년대까지는 한국사회를 식민지반봉건사회로 규정했으나, 70년 11월 제5차 당대회 이후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로 평가해 왔음을 상기할 때 NL진영이 이를 모르고 있다가 한민전 방송 이후 수정한 것이다.

 

 

2) 한국사회의 모순관계

 

이상의 한국사회에 대한 인식에서 NL진영은 한국사회가 미국과 한국민중과의 모순 즉 민족모순과, 파쇼통치체제와 그 물적 기반인 매판자본과 민중과의 모순인 계급모순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모순은 미국과 한국민중과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왜 NL진영이 반미자주화투쟁을 가장 중심으로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발견되는 것이다.

 

3) 한국사회혁명의 본질과 임무

 

한국사회에 대한 평가와 모순규정에 의하면 한국혁명의 본질은 미국의 식민통치를 척결하고 민족의 자주성 실현을 그 중심내용으로 하는 사회혁명으로서 본질에 있어서 민족해방혁명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한국사회에서 민중의 자주성을 유린하는 세력은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사회의 전 영역에서 지배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과 그 대리집단인 매판자본가, 지주, 상층관료들이며, 자주성을 억압당하는 계급 계층은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진보적지식인, 도시소자산계급, 일부 애국적 민족자본가, 애국적 군인이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이중에서 미국이야 말로 한국민중의 자주성을 억압하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매판자본가, 지주, 상층관료는 미국에 의해 육성되고 비호되는 대리세력이고, 민족모순이 해결되면 다른 모순도 해결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한국사회변혁운동의 기본임무는 미국지배와 그 대리세력의 군사파쇼통치를 청산하고 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변혁운동은 민족이 분열되고 국토가 양단된 나라의 반쪽에서 수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변혁운동은 민족해방의 임무와 민주주의적 임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해야 할 민족사적 임무도 있다고 NL진영은 보고 있다. 여기서 자주적이라 함은 미국의 식민지적 통치를 없앤다는 것이고, 평화적이라 함은 민족자주정부수립 후 북한과의 연방제 통일을 말한다.

 

이러한 임무로부터 NL진영은 3대투쟁과제를 도출해 낸다. 3대투쟁이란 반미자주화투쟁, 반독재민주화투쟁, 조국통일촉진투쟁을 말한다. 이러한 3대투쟁 가운데 반미자주화투쟁이 항상 최우선 과제로 나선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미국이야 말로 모든 모순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당시기에 투쟁을 전개함에 있어서 반미자주화투쟁을 중심으로 다른 투쟁을 결합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는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은 반미자주화를 실현하는데 유리한 사회적 여건을 조성해 준다고 보고 이 투쟁을 통해 미국의 한반도 식민통치의 기반에 균열을 내고 민족자주역량을 성장 시키는데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8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이 반독재 투쟁을 벌인 것은 이러한 투쟁전술에 입각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자신들의 투쟁을 민주화투쟁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 투쟁을 한 것이다. 조국통일촉진투쟁 또한 이를 가로막고 있는 주 세력이 미국과 그 대리통치세력인 군부독재권력이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으나, 남한의 반쪽혁명을 전 한반도 차원에서 진행한다는 의미에서 그 독특한 지위를 가진다. 그 구체적 내용으로는 연북의식 고취와 연방제 통일방안의 선전 등을 들고 있다.

 

4) 한국사회혁명의 대상과 동력

 

대상이란 혁명의 주요한 공격목표를 말하고, 동력이란 누가 이 혁명의 주요한 세력으로 나서는가에 대한 문제를 말하는데, 공산주의혁명의 전략전술상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한다. 그 시기, 그 사회에서 인간의 자주성을 유린 억압하는 세력, 즉 반동적 착취세력과 제 세력이 혁명운동의 대상이다. 이들에 따르면 미국과 반동관료배, 매판자본가, 지주 등이 대상이다.

 

동력은 주력군(기본동력)과 보조역량으로 나뉜다. 주력군이란 그 계급, 계층의 생활적 처지로 볼 때 당면혁명에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지며, 혁명의 완수를 위해 끝까지 가장 철저하게 싸울 수 있는 세력을 말한다. 한국사회에서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진보적지식인 등을 말한다.

 

보조역량은 혁명수행에 있어서 이해관계의 절실함이나, 투쟁에 있어서 철저함은 주력부대보다 떨어지며, 투쟁에 있어서 동요성을 보이기 쉬우나, 이들도 자주성을 유린 억압당하고 있기 때문에 당면 혁명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조역량으로 통일전선이라는 형태로 묶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조역량은 끊임없이 동요하는 세력이기 때문에 협력하면서도 비판하는 관점을 유지해야 하며, 일 단계 혁명이 수행되고 나면 이들 또한 다음 혁명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4.전대협 지하지도부와 전대협 강령 분석

 

전대협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NL진영의 전투적총학생회노선에 의거하여 구축된 대중조직이다. 대중조직은 전위의 지도를 받는 조직으로 기본적으로는 합법조직을 지향한다. 합법조직을 지향하는 이유는 보다 많은 학생들을 조직으로 끌어들일 수 있고, 그 속에서 활동하는 혁명적 전위인자를 대중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다는 논리에 의거해서이다. 따라서 전대협은 비합법 지도그룹의 활동공간이며, 그들의 지도노선이 관철되는 통로이다.

 

1) 전대협 지하지도부와 활동형태

 

< 반미청년회>

 

86년 학생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주사파 지하지도조직으로는 서울대의 「구국학생연맹」, 연세대의 「반제구국학생동맹」, 고려대의 「애국학생회」 등이 있었다.

 

「반미청년회」의 모태가 된 것은 고려대의 「애국학생회」였다. 그러나 건대투쟁 이후 당국의 수사에 의하여 주요 지도부가 검거되고 조직은 와해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와중에 전국대학들간의 연락체계는 살아남았다. 이들은 조혁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주사파 지도조직의 재건을 모색하고 그 결과 86년 12월에 「전국청년학생사상운동추진위원회」(이하 전사추위)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전사추위」는 고려대 주사파 잔존세력을 중심으로, 연세대, 서강대 등의 주사파 잔존세력을 규합하여 전국의 10여개 대학의 30여명으로 규합한 중앙지도조직과 서울, 수원, 영남, 호남의 지역을 지도하는 지역지도조직으로 2원화하여 조직을 편재하였다. 당시 학생운동의 활동인자는 각 대학별로 총학생회, 단과대 학생회, 과학생회에서 간부들로 활동하였는데, 이들 중 3-4학년을 중심으로 각 대학 지하지도부를 구성하고, 이들 중 일부를 「반미청년회」회원으로 선발하여, 전국 학생운동을 장악한 것이다.

87년 전대협의 조직노선인 「전투적총학생회론」은 이들 「전사추위」에 의해서 제기된 조직노선 이었고, 87년 서대협의 결성과 전대협의 결성은 이들에 의해서 배후에 주도되었다.

 

「전사추위」는 87년 6월투쟁과 전대협의 성과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혁명투쟁을 체계적으로 지도할 지도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87년 10월 중순 홍익대에서 김일성 주체사상과 「한민전」을 추종하는 「반미청년회」를 결성한다. 「전사추위」와 「반미청년회」는 동일한 지도부에 의해서 주도된 학생운동 지하지도부의 자체 변화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이들은 「대동단결」이라는 선전매체를 통하여 8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운동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 재야운동의 연합체였던 「민통련」에서 제기되었던 김대중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반미청년회」는 「대동단결 7호」에서 식민지 해방투쟁에서 대통령 선거가 갖는 의미를 주목하고, 후보와 결합하지 않는 선거전술은 현재 운동의 주체역량의 미비와 국민들의 선거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기대를 감안 할 때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여 당시 PD진영에서 제기 했던 독자후보전술인 민중후보론과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들에 따르면 당시 정세는 미국의 식민지 지배방식의 변화를 반영한 직접지배에서 대리통치체계의 구축으로 보았다. 노태우후보는 미국의 대리통치세력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87년 대통령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대리통치세력을 합법적으로 추인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미국의 기도를 좌절 시키기 위해서는 양김 중 어느 한 명과 결합해야 하는데 이들 중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김대중을 지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시 야당에 선거투쟁 결합에 관한 5개항의 조건을 내걸고 이를 수락한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것이다.

 

이들이 이러한 선거 전술을 채택한 것은 식민지 사회에서 민중들은 선거에 관심이 있는데 이러한 관심을 이용하여 다소 진보적인 후보와 단결하고 이를 승리로 이끌어서 향후 결정적 혁명승리의 유리한 조건을 만들겠다는 전술적 고려를 한데 따른 것이다.

 

「반미청년회」는 의장인 조혁(고대 노문4, 제적)을 중심으로 무력부, 연락부, 선전부, 후원부, 교앙부 등 5개 부서와 이와는 별도로 의장 직속으로 청년부와 학생부를 각각 두었다.

 

무력부는 그 밑에 구국결사대 8명이 소속되어 연세대 김철에 의해서 운영되었는데 이들은87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 미문화원 점거농성과 광주 미문화원에 대한 폭탄투척사건을 벌였다. 선전부는 김일성 주체사상의 전파와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론에 대한 조직원 들의 사상무장을 위해 「자주언론」이라는 지하 간행물을 발간하였다.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선전으로 대표적인 것은 북한방송이 주장한 KAL858기 폭파사건이 남쪽정부의 자작극이라는 내용의 전파였다. 이들은 각 대학에 대자보를 통해 이러한 선전을 하였고 기관지를 통해 계속 이러한 사실을 전파해 나갔다. 이들의 이러한 북한주장의 일방적인 수용이 20년이 오늘 우리언론에 의해 대중적으로 유포되고 있으니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교양부는 각 대학별로 정치학교를 운영하면서 혁명지도자를 양성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87년 「반미청년회」와 그 하부조직인 전대협에 의해 이루어진 선거전술인 김대중 비판적 지지운동은 학생운동 내부의 심한 반발에 부딪쳤다. 이러한 김대중 지지론을 앞장섰던 「반미청년회」의장 조혁은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끝난 88년 1월 「자주언론」편집자 조국 명의로 발표한 자기비판서에서 “나는 노태우 집권을 방조한, 운동가로서의책임을 통감하고”라는 내용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본 바와 같이 87년 전대협의 투쟁의 배후에 「반미청년회」가 있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조혁은 88년 투쟁을 위하여 “「한국민족민주전선」이 지령한 노태우 집권의 저지파탄과 단독올림픽을 저지하는 투쟁에 모든 노력을 다바쳐 싸울 것을 결의한다.」라고 하여 「반미청년회」의 투쟁은 「한민전」의 지령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조통그룹, 관악자주파>

 

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전대협의 주류였던「반미청년회」의 김대중 지지론에 반대하여 후보단일화론을 제기한 주사파가 있었는데, 후보단일화론을 주도한 그룹이 「조통그룹」과 「관악자주파」이다.

 

「조통그룹」은 연세대와 서강대 등 서울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 그룹은 87년8월 석방된 복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김대중 지지론에 반대하는 서울 서부지역 학생활동가를 중심으로 자신의 세력을 넓혀 갔다.

 

이 그룹은 「한민전」의 지도를 인정하였으나, 투쟁전술에서 당시 주류였던 「반미청년회」와 차이가 있었고, 88년 이후 「관악자주파」와 협력을 바탕으로 통일운동을 주도했다. 89년도 이들은 임수경 평양 파견을 주도했다.

 

한편 서울대 에서는 「구학련」등 학생운동 지도부가 사실상 궤멸된 상황에서 아직 검거되지 않은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서울대 활동가 조직을 재건하고 서울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 하였다. 이러한 서울대 중심의 주사파 그룹을 「관악자주파」로 불렀다. 이들이 자주파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이들은 「한민전」의 방침을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반미청년회」처럼 단일한 지도조직이 아니라, 서울대 활동가를 대표하는 리더들의 협의체 형식 이었다.

 

88년 서울대 김중기에 의해서 제기된 남북학생회담성사투쟁은 이들이 제기하였고, 「조통그룹」과 「반미청년회」가 수용해서 전대협이라는 대중조직을 통해 진행된 투쟁이었다.

 

이들 세그룹은 자파출신을 총학생회장에 당선시키거나, 활동가를 전대협 내부에 침투시켜 자신들의 지도를 관철시켜왔다.

 

예를 들면 . 이 당시 전대협의장인 이인영에게는 비서라는 직함으로 반미청년회에서 침투된 사람이 있었다. 훗날 수사를 통해서 밝혀졌지만 현재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인 이철우가 그 역할을 수행했다. 87년 당시 전대협은 연락사무국만 있었고, 전대협의 상시적인 업무는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서대협에서 담당했다. 서대협의 정책국이나, 편집국, 연대사업국, 투쟁국 등에 반미청년회 간부들과 조통그룹, 관악자주파그룹의 핵심활동가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대중조직인 전대협은 합법조직을 지향하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사상이나 투쟁노선은 상당히 대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그룹에 의해서 지도되기 때문에 그들의 노선과 자료에서 주체사상과 투쟁노선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자민통그룹이 장악한 89년 부터는 주체사상과 그 투쟁노선이 보다 선명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에 이르러서는 노골적으로 지도사상으로 주체사상을 거론하고, 북한의 투쟁노선을 추종하고 있다.

 

2) 전대협강령 분석

 

전대협은 전문과 강령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해보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는 백만 청년학도의 창조적 지혜와 힘을 하나로 모아 7천만 겨례의 염원인 자주민주통일된 새 조국 건설과 미래의 주인인 청년학생의 정의로운 삶을 위해 구국의 선봉대로서 다음과 같이 투쟁할 것을 조국과 민중 앞에 엄숙히 맹세한다.

 

1. 미국을 반대하고 모든 외세의 부당한 정치군사문화적 간섭과 침략을 막아내고 목숨보다 소중한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하여 조국의 자주화를 이룩한다.

 

1. 친미군사정권의 식민지 파쇼통치를 철폐하고 민중의 창조적자주적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완전한 사회민주화를 실현한다.

 

1. 조국의 영구분단을 막아내고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원칙 아래 조국의 통일을 이룩한다 ... "

 

이 전문과 강령에 대한 전대협 자체의 해설을 보기로 하자.

 

"전문에서 보다시피 전대협은 자주 민주 통일된 새 조국 건설과 청년학생의 정의로운 삶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시대의 보편적 이념은 자주 민주 통일로 요약될 수 있다. ... 자주민주통일, 즉 예속을 거부하고 자주를 닦고 독재를 반대하여 민주를 세우며 분단을 깨뜨려 통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총체적 좌표이다. 전대협의 강령은 이러한 자주민주통일이라는 시대의 보편적 이념에 기초하여 이를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전대협, 서울:돌베개,1991에서 인용)

 

전대협 강령의 전문에 대한 자체 해설에서 자주민주통일이 이 시대의 보편적 이념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주민주통일의 이념이란 북한의 주체사상이 밝히고 있는 3대 투쟁임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에서 전대협은 그 활동 목표로 남한의 반미자주화, 반독재민주화, 더 나아가 북한과의 연방제에 의한 통일이 전대협의 최종적인 목표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동호의 전체기사  
2008년 10월09일 00시33분  

전체 독자의견: 1 건
고구려
점심시간이라 퍼가고 퇴근후 읽어 보렵니다. ^^ (2013년 10월24일 06시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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