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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규원양 어린시절 사진  2011년 06월24일 11시05분


[책소개]"수용소 어둠속으로 잠겨버린...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  
 
[편집자서문] 한국판 ‘실화(實話) 파우스트’
 
저자 오길남을 인터뷰했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지(紙)의 우베 슈미트 기자는 그의 독일어 실력을 격찬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책에 구사된 저자의 모국어, 곧 한국어 실력이야말로 일품(逸品)인 것을 알아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수준 높은 문체와 묘사력, 서술력, 그리고 탄탄한 구성까지 이 책은 한 편의 잘된 문학작품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소설과 같은 허구적 작품이었어야만 했다. 만일 그랬다면 한 지식인의 편력과 좌절, 환상과 환멸,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처절한 희구를 수준 높게 구현한 작품으로 의미 있게 평가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이 책은 실화이고 체험담이며, 지금도 끝나지 않은 현실이라는 데 우리의 고통이 있다. 이 책을 문학작품을 감상하듯 여유 있게 읽어낼 수 없는 것은 수 많은 혜원, 규원이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북한 땅, 그것도 가장 깊숙이 그늘진 정치범수용소에서 처참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자유문학사)라는 제목으로 1993년에 첫 출간된 바 있다. 일본에서도 출간되어 상당한 부수가 팔려나갔지만 한국에서는 판도 쇄도 거듭되지 못한 채 오래 전에 절판되었다. 한국에서 오길남 일가의 비극은 그다지 큰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18년만에 다시 이 책을 출간하기로 결정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0년 전 기자로서 오길남 박사를 인터뷰하러 그의 아파트를 찾았을 때, 느닷없이 가족들의 사진을 맡기는 것이었다. 안방에 놓아둔 액자 속 사진까지 몽땅 끄집어내어 건네며 자신이 죽어 없어져도 혜원, 규원,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위해 뭔가 말해 달라고 했다.

액자에 들어있었던 사진은 자전거 옆에 앉아 고개 숙인 두 딸의 모습이다. 이 날 잔디밭 한 켠에는 친구 송두율 교수의 두 아들 준과 린이 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두 가족은 그 날 오박사네가 북한으로 가기 전 작별 나들이를 했던가 보았다. 나이도 비슷한 네 아이들의 운명은 그때까지만 해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몇 년 전 구속된 아버지를 위해 피켓을 든 송교수의 아들들을 언론에서 보았다. 훌륭하게 성장한 그들은 멋진 외모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혜원이와 규원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림을 잘 그리고 독서를 좋아했던 혜원과, 바이올린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는 규원.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을 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간염을 앓는 중에 있었다는 그들의 어머니 신숙자 여사는 일흔 나이에도 잘 버텨내고 있는 것일까?

이들의 행적은 1991년경 함경남도 요덕군 15호 관리소 곧 요덕 정치범수용소 혁명화구역에서 보았다는 증언을 끝으로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최근에 요덕 혁명화구역에서 출소했다 탈북한 사람들은 이들을 목격한 바가 없었다고 전한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건너편 완전통제구역, 석방되지 않는 종신(終身) 유형지로 옮겨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모두 살아있으리라고 믿는다. 다시 책을 출간함으로써 이들의 이름을 크게 불러주고 싶다. 그리하여 제목도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으로 고쳐 지었다. 안네 프랑크가 유태인 학살의 서글픈 상징이 되었던 것처럼 혜원이, 규원이를 크게 부르면 부당하게 박해 당하는 정치범수용소 수감자들의 존재를 세상밖으로 안내하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는다.

또 한 가지 재출간의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주제의 측면에 있다. 이 책은 포괄적으로 말하면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지식인의 존재 일반에 관해서, 그리고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사의 일부가 되기 원했던 지식인들의 실존에 관해서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이 책에는 1970년대, 80년대 유럽에서 조국의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제각기의 방식으로 조국 사랑의 방법을 구했던, 진지하고 엄숙한 지식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저자 오길남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실존 위에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도사리고 있었던 어둠의 실체에 대해 몇몇 사람은 너무 아둔했다. ‘날것 그대로의 악(惡)’ 앞에서 그들의 지성은 무력증에 걸린 것처럼 무너져버린 것이다.

월북한 오길남이 북한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남쪽에서 넘어온 철학교수, 외교관, 유학생 부부 등 다양한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다시 건너올 수 없는 환멸의 다리를 건너버린 이들은 오길남 부인 신숙자 여사가 표현한 대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다른 사람의 눈까지 찌른 채”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물론, 귀환자 오길남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놓는 데 큰 도움이 못 되었던 것 같다. 오길남의 친구들은 북한에서 돌아온 그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질시하고 천대한 쪽에 가까웠다.

이런 상황은 2011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인이 된 윤이상은 여전히 숭상 받고 있고, 간첩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송두율 역시 많은 지지자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오길남은 “가족을 사지에 몰아넣은 못난 남편, 아버지”로 낙인 찍혀 있다. 일전에 그의 집을 방문했더니 절망이 그를 또 다른 수용소로 몰아넣은 듯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다시 출간하는 이 책에 한 마디 써주기를 바랐으나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이 책은 한국판 <<파우스트>>라고 불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이렇게 말해준다. “여보게. 분별에 이르기 위해서는 헤맬 수밖에 없는 법이라네.” 정말로 무서운 대가를 치르고 겪어보아야만 분별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지식인들의 오판과 편력으로 인해 값을 치르는 이들은 곧잘 타인들일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왜 순진무구하고 결백한 사람들이 어리석은 지식인들의 지적 허영의 결과로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개인의 일만이 아니다. 지금 북한의 처절한 상황이야말로 그 많은 지식인들의 오판과 망집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바야흐로 역사의 황혼이 붉어질 때 지혜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른다면 다시 어리석은 일들은 반복되지 않을 것인가? 긍정적인 대답은 쉽지 않다. 그러나 아직도 불안한 평화를 이어가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저자 오길남 박사에게 이 책의 재출간이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별을 지도삼아 길을 갈 수 있는 시대는 행복하다’고 하였는데, 적어도 오길남의 시대는 필시 별이 더 이상 길을 지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근대(近代)라고 부른다. 한 때 루카치 자신도 그러했듯 공산주의 사상을 지도삼았던 많은 근대 지식인들이 잘못 온 길을 계속 이어가고 있을 때, 오길남 박사는 삶을 통해 입장을 수정했다. 분별에 이르기 위해 너무 큰 대가를 치렀으나 근대 지식인 오길남의 비극은 이런 의미에서 역사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기 직전 파우스트 박사에게 손을 내밀어 구한 자가 누구였던가! 파우스트의 결말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한다.”라고 말한다. 남편 오길남은 물론, 무고하게 삶을 강탈당할 뻔했던 유학생들, 그리고 숱한 지식인들의 어리석음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신숙자 여사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표한다. 그녀의 일갈을 다시 옮긴다.

“다시 한 번 부탁해요. 정의를 사랑하는 순결무구한 젊은이들이 대남 공작 기구의 제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추악한 삶은 존귀하지 않아요. 혜원 아빠, 이 말 명심하세요. 나가세요.”

혜원이와 규원이, 신숙자 여사, 그리고 이름 모를 무고한 정치범수용소 수감자들이 하루 빨리 자유와 평화를 얻기를 아픈 마음으로 기도한다.

김미영(세이지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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