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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열매, 자본주의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사명을 감당키 싫어하는 절대다수 그리스도인들에게


1. 일을 저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여가, 휴식, 가족, 평안함 등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그랬다. 플라톤은 ()스러운 것과 () 것을 철저히 나눴다.


육신에 속한 존재는 영혼의 길을 왜곡하고 방해해서 진리를 좇지 못하게 한다.(플라톤의 <파이돈>)


플라톤이 말한 육신에 속한 존재는 음란, 정욕, 탐심에 잡힌 더럽고 추잡한 존재만 아니다. 범위가 넓었다. 세상에서 영적인 통찰과 정결한 삶을 추구하며 훈련하는 이들은 힘닿는 데까지 육체를 무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죽음 일종의 해방이고,노동이란 최상의 철학적 명상을 막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자신의 <정치학>에서일하지 않아도 살아갈 능력이 되는 실업 상태야말로 가치 있는 삶의 번째 요건이라고 했다.


자연은 자유민과 노예의 몸을 구별할 것이다. 한쪽은 노예 노동에 적합하도록 강건하게 만들고 다른 한쪽은 바르게 만든다. 후자는 일에는 쓸모가 없지만 전쟁과 평화 양쪽에 필요한 기술들, 정치적인 삶에 유용하다.···어떤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반면 다른 이들은 노예일 수밖에 없으며 후자에게는 종이라는 신분이 편리하고 타당하다.(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잔인해 보이는 위대한 철인의 일갈은 이렇다. ‘너희는 열심히 일해라. 우리는 너희를 다스리고 정복하고 말만 것이다.’


노동(勞動) 여가(餘暇)노예적 저주귀족의 축복으로 나누는 시각은 중세 년을 거치며 경직돼 버렸다. 성속(聖俗) 이원론이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일을 열심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노동은 그저 먹고 살고 입기 위한 수단, 도구란 것이다. 세상 일에 대한 언급과 평가도 교회가 해서는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당연히 정치와 종교는 완벽하게 분리됐다.


2. 종교개혁은 대한 고대와 중세적 인식을 깨는 일종의 의식 혁명이었다. 신교도들은 마르틴 루터, 칼뱅이 말하는 소명의식을 갖게 됐다. 주님이 시대에 나를 부르신 이유(calling), 역사 속에 택하신 이유(election) 있다고 믿었다. 일은 그저 천박한 지상의 저주가 아니라 주님의 사명을 이루어 승리의 면류관, 천상의 상급을 받기 위한 통로로 여겼다.


열심히 일하고 축복(祝福) 누리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축복은 주님의 선하고 기쁘고 온전한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니 사치, 향략, 방탕의 소재가 없었다. 근면, 성실, 검약을 통해 자본과 기술을 축적해 주님을 기쁘게 일을 위해 다시 쓰여야 했다. 이것은 선교(宣敎) 열정으로 이어졌다.


루터는부르심, 직업을 뜻하는 독일어 베루프(Beruf) 번역했다. 이것은 소명에 관한 전통적 시각을 견지해 중세교회와 격렬한 논쟁을 불렀다. 당시 중세교회는교회만이 지상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라는 인식이 있었다. 교회를 위해 교회 안에서 행하는 직무만이 주님을 위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신부와 수녀가 되지 않고는 부름 받아 주님을 섬길 없었고, 이를 신령한 직분(spiritual estate)이라 불렀다. 당연히 성직이 아닌 그밖에 다른 세속적 노동은 저열하고 불가피한 일이었다. 주님이 자신의 일을 향한 부르심과 택하심이 있다는 사명감이 없으니,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해야 하는 것이 일이었다.


루터는 크리스천들에게비록 세속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들의 일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이라고 했다. 이런 생각들은 칼뱅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져, 일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정리됐다.


3. 모든 직업을 주님이 땅에 우리를 부르고 택하신 이유로 보았던 루터와 칼뱅적 시각과 금욕 가난 고귀한 덕으로 여겼던 중세 가톨릭 교회의 충돌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금욕과 가난을  성경적 정의라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포장하여 부와 권력을 독점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여 새로운 자본과 기술을 축적한 신교도의 시각에서, 그들은 부패한 기득권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돈과 권력은 물론 신앙의 자유를 놓고 구교도와 신교도는 죽기 살기의 싸움을 벌였다. 이것이 역사 가장 끔찍하고 지루하게 이어졌던 이른바 종교전쟁이다.

   

4. 도전은 응전을 통하여 신선한 열매를 맺는다. 프랑스 위그노, 영국의 청교도 신교도들은 근대 자본주의(capitalism), 정확히 말하면 시장 경제의 가치를 정립해 갔다. 자유 시장을 통한 경쟁이 최대의 이윤과 최적의 효율을 이끌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을 또한 성경이 가르친 본질로 여겼다. 칼뱅은 이러한 경제질서를자연 질서(the order of nature) 불렀다. 중세적 장원제, 일종의 집산주의나 사회주의 형태의 과거로 가자는 가톨릭 교회와 투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 가치이다. 훗날 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이를 있는 그대로의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 명명했.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성경, 무엇보다 종교개혁의 열매였다. 다만 자본주의라는 하드웨어가 작동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는 훗날 막스 베버가 명명한 프로테스탄트 윤리(die protestantische Ethik), 소명의식을 갖춘 크리스천들의 직업의식이었다. 나의 일에 주님의 부르심(calling) 택하심(election) 있음을 믿으며, 일을 통해 주님을 기쁘게 비전을 이루는 것이다. 일평생 감자를 깍아도 소명의식이 없는 자와 있는 자의 미래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망을 찾고 그것을 믿으며 가는 것이 인간과 그들이 모인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가르는 것이다.  


written by Sunguk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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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4월24일 12시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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