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생각대로’란 광고 카피가 유행한다. 뒤집어보면 그만큼 ‘생각대로’ 살기가 힘든 세상이라는 민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고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말했다. 의지가 없으면 운명에 끌려 다녀야 한다는 얘기다.

이 잠언적 시구에서 착상을 얻은 한국 소설이 요즘 프랑스 언론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2000년대 한국 문단에서 동인문학상·대산문학상·이산문학상 등을 휩쓴 소설가 김영하의 장편 ‘빛의 제국’(2006년) 불어판이 최근 르 몽드 등 유력 일간지에서 ‘필연과 탈주에 관한 거부할 수 없는 소설’이란 서평과 함께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소설이 프랑스 언론에서 눈길을 끄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주인공 ‘김기영’이 북한에서 남파된 고정간첩이면서 동시에 북쪽에서 10여년 동안 아무런 지령을 받지 못해 그 자신이 간첩임을 잊어버렸다는 부조리한 상황 설정 때문이다.

남·북한 분단을 다룬 한국 소설은 그동안 많이 해외에 소개됐지만, 2000년대 오늘의 남·북한을 김정일 체제에서 훈련받은 북한 스파이의 눈으로 그린 소설이란 점에서 해외 출판인들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북한 혹은 김정일의 브랜드 파워’이기도 하다.

아무튼 ‘빛의 제국’의 주인공 간첩 ‘김기영’은 80년대에 남파돼 한국 사회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받아들여 ‘생각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생각하는’ 386세대의 중산층 가장이 됐다.

이 소설의 고정간첩들은 간혹 만나면 아파트 평수와 부부관계, 늘어나는 뱃살 이야기를 하다가, 대선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 등등 동창생들처럼 대화를 나누고, 노래방에서 놀다가 헤어진다.

작가 김영하는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처남이 김정일의 경호원이었다는 한 탈북자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었다”면서 “경제난에 직면한 북한은 외화 부족으로 남파 간첩에게 공작금을 보내지 못했고, 많은 고정간첩이 불법체류자처럼 살았다”고 말했다.

작가 김영하는 그런 한심한 고정간첩들의 일상에 상상력을 보태 남북 분단의 아이러니를 그려내기도 했다. 주인공 간첩이 80년대 대학에 입학해 운동권 학생들로부터 주체사상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수령’과 ‘당’을 내세웠다면, 남한은 그 자리에 ‘국가’와 ‘민족’만 넣는다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90년대 이후 남·북한의 차이가 극대화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남과 북 사이에 ‘낀’ 존재가 된다. ‘대규모 정리해고와 연쇄도산, 백화점과 다리의 붕괴, 지하철 화재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잊혀진 스파이로 살아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런데 어느 날 북으로부터 귀환 명령이 떨어지면서 이 ‘잊혀진 스파이’는 정체성 혼란에 휩싸인다. 남과 북 어느 쪽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했던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소설 ‘빛의 제국’에서 ‘김기영’으로 환생해 2000년대 남·북한을 모두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청년 실업’ 세대에 불량국가 북한은 결코 대안체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청년들이 선택할 대한민국 바깥의 중립국도 존재하지 않는다. 불만은 영혼을 잠식할 것이다.

선진화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가 하루빨리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광장’의 이명준보다 지적으로는 덜 성숙하지만, 이념적으로는 더 편향된 ‘불만 청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행여 자기들 ‘생각대로’ 우리 내부의 세대 갈등을 증폭시킬까 걱정이다. 젊은 세대는 언제나 ‘생각대로’ 살고 싶지, ‘사는 대로’ 생각하는 중년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론가 정과리가 ‘들어라 청년들아’라는 책에서 지적했듯이, 그들을 선동할 세력은 늘 도덕적 선악 이분법으로만 무장된 ‘청년 문화’의 탈을 쓰고 있지 않은가.

출처: 조선일보 박해현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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